소유권은 야만시대 초기에 발생했고, 소유권 제도는 평화로운 생활습관이 약탈적인 생활습관으로 이행하면서 출현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이 포로 처리였다. 포로들은 공동으로 소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설사 개인이 그들을 전유하더라도 집단에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특히 포로 여성의 노동 산물은 주인의 안락과 충만한 삶에 유용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유능한 하인을 많이 소유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증거로도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포로 여성을 포획자가 배타적으로 사용하고 학대하며 혼인관계까지 맺는 관습적 권리가 나타나고 일반화되었다. 이와 같은 관습적인 사용권과 남용권은 소박한 의미의 소유관계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소유권-결혼 형태가 사유 재산권 및 가부장제 가정의 원형이다. 그리고 이 제도가 확고하게 정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가 진화하는 어느 시점에서 소비재에 대한 소유권이 출현했다.
Contents
옮긴이 서문·9
1부 소유권과 현대 여성
Ⅰ. 여성 의상의 경제학·23
장식 원리는 의상의 기원·25
여성 사치성의 본질·28
여성이 모피를 좋아하는 이유·30
과시적 낭비는 모든 의상의 원리·33
여성 의상의 세 가지 주요 원리·36
Ⅱ. 야만시대 여성의 지위·41
여성 금기는 약탈문화에서 기원·43
전리품인 포로 여성의 지위·47
용감한 사람만이 미인을 차지한다·49
결혼은 예속 상태로 편입되는 입문 의례·52
가부장제의 근원은 엄격한 소유권 제도·55
부계 가계로 귀결된 결혼제도는 영원불변일까?·57
Ⅲ. 소유권의 기원·61
소유권의 근거는 생산적 노동·63
원시인의 소유개념과 사유습관·66
소유권의 형성과정·71
소유권 제도는 약탈적인 생활습관으로 이행하면서 출현·77
포로 여성은 개인 소유권의 시작일까?·80
포로 여성과 혼인형태는 가부장제 가정의 원형·82
2부 자본주의 사회와 노동
Ⅳ. 약탈문화의 기술·87
인간은 집단유전의 산물·88
소유권 개념의 탄생과 문화·92
Ⅴ. 제작능력과 노동의 지루함·95
노동을 싫어하는데, 스포츠는 왜 좋아하는가?·98
인간은 제작능력을 향상시킨 사회적 동물·105
약탈적 생활은 도구사용이 발달한 후에 나타났다.·110
약탈문화에서 형성된 노동은 비천하다는 관념 ·117
Ⅵ. 현대 문명에서 과학의 위상·121
현대 문명인들의 과학 숭배·125
어떻게 과학을 숭배하게 되었는가?·127
고대엔 의인화하거나 물활론적인 설명을 했었다·131
과거에는 우주 자연의 법칙을 권위있는 법령이나 상징적 힘으로 설명했다·136
산업발달로 제도와 생활습관의 변화와 함께 과학적 탐구방법과 정신이 등장하다·139
기술 발달로 자연현상의 해석은 의인화를 벗어나게 되었다·142
3부 전쟁과 평화
Ⅶ. 사보타주·149
기업가와 노동자 모두의 용어 사보타주·151
생산량 조절도 일종의 사보타주·155
생산량 조절은 기업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다·159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하는 사보타주들·164
Ⅷ. 볼셰비즘은 누구에게 위협이 되는가?·171
기득권층의 소유권 폐지와 볼셰비즘·177
확고한 기반을 다진 볼셰비즘·182
볼셰비즘은 누구에게 위협이 되는가?·188
Ⅸ. 볼셰비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을 택할 것인가·193
볼셰비즘은 기존 법률과 관습을 타파한다·196
부재자 소유권을 위협하는 볼셰비즘·201
부재자 소유권을 지키기 위한 기득권 세력의 ‘전쟁기도와 전쟁소문’·205
찾아보기·210
Author
소스타인 베블런,정헌주
19세기 미국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 주 카토 부근의 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났다. 1880년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지만 예일 대학교에서 1884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가족이 사는 농촌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작업을 했다. 베블런은 1892년이 되어서야 시카고 대학교의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진리, 즉 ①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 ②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술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책은 경제이론 뿐 아니라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 덕분에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며 마르크스의 체계는 지속력도 없고 사고력도 부족하다고 단언했다. 베블런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집필에 더욱 열중해 <제작본능과 산업기술의 실태>(1911) <독일 제국과 산업혁명>(1915)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 <미국의 고등교육>(1918) 등을 펴냈다.
그는 사망하기 전 10여 년간을 뉴욕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연구소’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는 <기득권과 산업기술의 현황>(1919)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1923) 등이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락스다엘라 사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했던 대공황이 엄습하기 얼마 전인 1929년 8월 3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근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저서 <변화하는 우리의 질서에 관한 단상들>은 그가 죽은 뒤 1934년에 출간되었다. 독자들은 늘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다.
19세기 미국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 주 카토 부근의 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났다. 1880년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지만 예일 대학교에서 1884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가족이 사는 농촌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작업을 했다. 베블런은 1892년이 되어서야 시카고 대학교의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진리, 즉 ①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 ②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술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책은 경제이론 뿐 아니라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 덕분에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며 마르크스의 체계는 지속력도 없고 사고력도 부족하다고 단언했다. 베블런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집필에 더욱 열중해 <제작본능과 산업기술의 실태>(1911) <독일 제국과 산업혁명>(1915)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 <미국의 고등교육>(1918) 등을 펴냈다.
그는 사망하기 전 10여 년간을 뉴욕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연구소’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는 <기득권과 산업기술의 현황>(1919)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1923) 등이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락스다엘라 사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했던 대공황이 엄습하기 얼마 전인 1929년 8월 3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근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저서 <변화하는 우리의 질서에 관한 단상들>은 그가 죽은 뒤 1934년에 출간되었다. 독자들은 늘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