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를 키운 것이 '8할의 바람'이었다면, 작가 현기영을 키운 것은 '8할의 바다', '제주바다'였다. 무려 13년 만에 펴내는 두 번째 산문집 제목이 그렇고, 소설가로서 혹은 앙가주망(engagement)으로서의 이름을 알리게 한 계기 역시 '제주 4.3'과 관련 - 최근 정부는 제주 4.3사건 희생자가운데 1천715명을 '4.3특별법'에 의해 '희생자'로 공식 결정했다 - 이 있으니 말이다.
표제작인「바다와 술잔」을 보면 작가를 태어나게 하고 성장하게 한 제주 바다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폐결핵을 앓던 첫사랑 소녀와 미대생 선배, 고등학생 신분으로 같이 술을 마시며 '행악질'을 하던 절친한 친구들의 모습을 바다에서 다시 본다. 그리고 위안 받는다("자, 그때 그 절망과 슬픔을 위하여! 나는 술잔을 들엇 술의 수면을 쪽빛 바다의 수평선에 맞춘다. 술잔 속의 술이 바다의 쪽빛으로 물들고, 나는 그 쪽빛을 꿀꺽 들이킨다").
그의 발밑에서 철썩이던 파도는 그러나, 그에게 추억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다. 현대사의 아픈 기억들은 파도가 철썩일 때마다, 그 빈틈을 통해 작가에게 말을 걸어왔다. '4.3'으로 인해 고향 사람들은 언제나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은 "숙명적인 열패감"과 "자기 부정"을 낳았다. 이후 작가는 '제주도'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아무튼 그 무렵의 나는 일단 4.3에 관심을 갖게 되자, 그것을 제쳐 놓고 다른 얘기를 쓴다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졌다").
전체는 '인간과 대지' '잎새 하나 이야기' '상황과 발언' '말의 정신' '변경인 캐리커쳐'의 5부로 나뉘어 있는데, 작가의 고향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신문에 실렸던 시평들과 엽편 소설 그리고 작가와 친분을 나눈 이들에 대한 짤막한 글들도 실려 있다. "이순, 청산이 도두보이고, 흙내가 고소해지는 나이"에 쓴 산문집인 만큼,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많은 내용들을, 나이에 걸맞게, 때로는 호통치며 때로는 보듬어 안는 태도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제주의 바닷 바람은 그를 강하게 키워 놓은 모양이다.
Contents
작가의 말
1. 인간과 대지
바다와 술잔
바다, 인간의 모태
저 거친 초원의 바람 속에서
지워진 풍경
자연아로서의 삶
(...)
2. 잎새 하나 이야기
세월 밖의 사내
회주먹 아바이
정임의 발견
실종
봄병아리
(...)
4. 말의 정신
나의 문학적 비경 탐험
변신의 즐거움
21세기 작가의 운명
초토의 꿈 - 인간 긍정의 문학
5. 변경인 캐리커쳐
어른 속의 아이 - 시인 신경림
웅혼한 4.3서사극 - 화가 강요배
재입산의 꿈 - 소설가 김성동
몸 속의 오동나무 - 시인 이재무
잃어버린 공동체의 꿈 - 시인 박철
(...)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1941년 제주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20여 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 제5회 만해문학상, 제2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1999년 『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집 『순이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타는 섬』『누란』, 산문집 『젊은 대지를 위하여』, 『바다와 술잔』 등이 있다. 우리 현대사의 이면을 다룬 깊이 있는 작품을 써왔고, 중후하고 개성 있는 문체로 오늘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