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요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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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1/01/27
Pages/Weight/Size 148*210*20mm
ISBN 9788994575568
Categories 인문 > 동양철학
Description
이 책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초학용 교재이자 유학 입문서인 『격몽요결』을 한글로 알기 쉽게 풀이하여, 독자에게 우리 옛 고전의 의의와 가치를 전달하며, 또 한자를 직접 손으로 써 보고, 한문 해석의 문리를 스스로 익히는 데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격몽擊蒙’은 사리에 어둡고 우둔한 어린이를 일깨운다는 뜻이고, ‘요결要訣’은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해결하는 데 꼭 필요한 비법이나 가장 중요한 뜻을 가리킨다. 이 두 단어의 의미를 헤아려서, 곧 율곡 선생이 『격몽요결』을 저술한 취지를 바로 알 수 있다.

이 책의 편집 구성상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소개하자면, 우선 한자 풀이는 훈과 음을 달되 그 한자의 대표적으로,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뿐만 아니라 문맥과 품사 용법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의미도 나열했다.

또 문장 풀이에서, 한문 공부의 입문자를 이 책의 일차 독자로 상정하여, 한문 해석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해하기 쉽게 되도록 직역하였다. 문맥에 따라, 그리고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역자가 의역을 한 곳은 그 설명을 덧붙여 명기했다.

손으로 직접 글을 써 보는 필사의 그 학습적 효과는 눈으로만 읽는 독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책의 구성에서, 한자 어휘와 문장 구절을 독자가 스스로 써 보며 익힐 수 있는 연습란을 별도로 마련한 까닭이다.
Contents
격몽요결 序 擊蒙要訣 9
입지장 第一 立志章 27
혁구습장 第二 革舊習章 43
지신장 第三 持身章 60
독서장 第四 讀書章 112
사친장 第五 事親章 134
상제장 第六 喪制章 155
제례장 第七 祭禮章 186
거가장 第八 居家章 201
접인장 第九 接人章 232
처세장 第十 處世章 254
Author
이이,김현길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