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어디선가 문서를, 그것도 매우 높은 수준의 문서들과 지식을 끈기 있고 조신하게 다뤄온 사람. 수많은 지성의 충실한 동반자, 그들 그늘 아래의 조용한 그림자. ― 「옮긴이의 글」에서
현대 저작물 기록 보관소(IMEC) 부소장, 전시 기획자, 그리고 소설가. 현재 나탈리 레제(Nathalie Leger)라는 이름을 설명해낼 수 있는 수식들이다. 1960년생으로 파리 출신인 나탈리 레제는 오랜 시간 고급 문헌을 다뤄온 연구자로, 그간 국내에는 직접적으로 소개된 바가 없다. 그러나 레제가 연구해온 작가들의 이름은 친숙하다. 롤랑 바르트와 사뮈엘 베케트. 2002년과 2007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레제는 두 작가의 대규모 전시를 기획했다.
또한 바르트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한 마지막 두 강의를 토대 삼은 『소설 준비 I, II』(쇠이유-IMEC, 2003)와 어머니를 잃은 다음 날부터 쓰기 시작한 쪽지 모음으로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바 있는 『애도 일기』(쇠이유-IMEC, 2008)도 레제의 손을 거쳤다. 한편 그녀는 이러한 연구 방식을 차용해 두 편의 소설을 썼다. 19세기 귀족이자 고급 창부였던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의 삶을 그린 『노출(L’Exposition)』(P. O. L., 2008), 이어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의 아내이자 감독이며 배우였던 바버라 로든에 대해 쓴 『바버라 로든의 생애에 대한 부기(Supplement a la vie de Barbara Loden)』(P. O. L., 2012). 뒤늦게 당도한 소설들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잔잔한 호평을 얻었다.
이 책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은 이렇듯 수년간 대가들의 이름 뒤에서 작업해온 나탈리 레제의 밀도 높은 작업물로, 그녀의 첫 책이다. 평생 높은 수준의 문서를 다루다 뒤늦게 첫 책을 낸 이의 선택. 베케트의 문서들을 다루고 베케트의 전시를 기획했던 이가 베케트에 대한 글을 쓴 것은 당연해 보인다. 2006년 프랑스 출판사 알리아에서 출간된 레제의 이 책은, 그 제목이 일차적으로 드러내듯,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삶을 다룬 전기(傳記)이다. 그러나 이 얇은 책은, 그 두께가 상징하듯, 여느 전기와는 확연히 다른 인상이다. 차라리 이렇게 일컬어야 적합할 듯하다. 사뮈엘 베케트라는 한 인간에 대한, 한 편의 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