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님 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모님은 빨랫줄에 걸어놓은 속옷까지 훔쳐갈 정도로 열악한 동네에 살면서도 자녀들의 교육에 열성적이었고, 결국 삼남매 중 둘을 내과의사로 키웠다. 특히 치 후앙은 아시아 이민가정에서 ‘성공’의 표상으로 여기는 하버드 대학 의대에 입학했다.
안정적인 수입과 명예가 보장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졸업을 1년 앞두고 볼리비아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불행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 속 외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 최빈국 볼리비아에서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의 현실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달러를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어린 소녀들, 구걸한 돈으로 밥 대신 시너와 술을 사는 아이들, 자해와 폭력과 도둑질로 얼룩진 거리의 현실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치 후앙은 8개월 동안 매일 밤 진료가방을 챙겨 거리로 나갔다. 아픈 아이들을 치료하는 한편, 거리를 떠나 고아원에서 지내도록 설득했다. 처음에 그의 노력은 실패하는 듯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믿음에 보답하듯 아이들은 아주 천천히 변화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이듬해 치 후앙은 하버드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지금은 라헤이병원(Lahey Hospital Medical Center) 부원장과 병원의학부 의장, 터프츠의대(Tufts Medical School)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또한 비영리기관 국제카야어린이단체(Kaya Children International, www.kayachildren.org)를 설립해 볼리비아에 고아원을 짓고 아이들을 위한 자립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미국과 볼리비아를 오가며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님 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모님은 빨랫줄에 걸어놓은 속옷까지 훔쳐갈 정도로 열악한 동네에 살면서도 자녀들의 교육에 열성적이었고, 결국 삼남매 중 둘을 내과의사로 키웠다. 특히 치 후앙은 아시아 이민가정에서 ‘성공’의 표상으로 여기는 하버드 대학 의대에 입학했다.
안정적인 수입과 명예가 보장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졸업을 1년 앞두고 볼리비아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불행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 속 외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 최빈국 볼리비아에서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의 현실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달러를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어린 소녀들, 구걸한 돈으로 밥 대신 시너와 술을 사는 아이들, 자해와 폭력과 도둑질로 얼룩진 거리의 현실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치 후앙은 8개월 동안 매일 밤 진료가방을 챙겨 거리로 나갔다. 아픈 아이들을 치료하는 한편, 거리를 떠나 고아원에서 지내도록 설득했다. 처음에 그의 노력은 실패하는 듯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믿음에 보답하듯 아이들은 아주 천천히 변화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이듬해 치 후앙은 하버드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지금은 라헤이병원(Lahey Hospital Medical Center) 부원장과 병원의학부 의장, 터프츠의대(Tufts Medical School) 조교수로 일하고 있다. 또한 비영리기관 국제카야어린이단체(Kaya Children International, www.kayachildren.org)를 설립해 볼리비아에 고아원을 짓고 아이들을 위한 자립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미국과 볼리비아를 오가며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