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1940년 터키의 섬 임브로스에서 태어났다. 초·중등 교육을 임브로스 섬과 콘스탄티노플에서 받았다. 콘스탄티노플 할키 신학교에서 대학 교육을 마친 후 로마의 ‘교황청 동방 연구소’, 스위스의 ‘보세이 에큐메니칼 연구소’ 그리고 뮌헨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로마에서 교회법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보제 서품을, 1969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8~1972년까지 할키 신학교의 부학장을 지냈으며, 1990년까지 고 디미트리오스 세계총대주교의 비서실 실장을 지냈다. 1973년 필라델피아의 주교, 1990년에는 할키돈의 대주교가 되었다. 1991년 10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선출됨으로써, 세계총대주교좌에 착좌했다. 세계의 여러 유수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어, 터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를 구사하며,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하다.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세계 정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 전통의 살아있는 계승, 지역 정교회들 간의 협력, 현대 세계에서 정교회의 공통된 증언을 위해 헌신해왔다. 알바니아와 에스토니아의 자치 정교회들이 다시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섰으며, 전통적으로는 정교회 국가였으나 철의 장막 뒤에서 수십 년 동안 종교적인 박해를 받아오던 수많은 정교회 국가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가톨릭, 성공회, 그 밖의 다른 그리스도교파들과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해 왔으며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긴밀하게 참여하며 활동했다. 상호 존중과 종교의 자유 정신에 입각하여 이슬람과 유대교 등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정의, 평화, 인권, 차별과 폭력, 광신주의 등 현대 세계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복음적 전망과 대안들을 제시하며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왔다. 특별히 전세계의 환경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녹색 총대주교”라는 명성을 얻었다.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1940년 터키의 섬 임브로스에서 태어났다. 초·중등 교육을 임브로스 섬과 콘스탄티노플에서 받았다. 콘스탄티노플 할키 신학교에서 대학 교육을 마친 후 로마의 ‘교황청 동방 연구소’, 스위스의 ‘보세이 에큐메니칼 연구소’ 그리고 뮌헨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로마에서 교회법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보제 서품을, 1969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8~1972년까지 할키 신학교의 부학장을 지냈으며, 1990년까지 고 디미트리오스 세계총대주교의 비서실 실장을 지냈다. 1973년 필라델피아의 주교, 1990년에는 할키돈의 대주교가 되었다. 1991년 10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선출됨으로써, 세계총대주교좌에 착좌했다. 세계의 여러 유수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어, 터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를 구사하며,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하다.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세계 정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 전통의 살아있는 계승, 지역 정교회들 간의 협력, 현대 세계에서 정교회의 공통된 증언을 위해 헌신해왔다. 알바니아와 에스토니아의 자치 정교회들이 다시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섰으며, 전통적으로는 정교회 국가였으나 철의 장막 뒤에서 수십 년 동안 종교적인 박해를 받아오던 수많은 정교회 국가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가톨릭, 성공회, 그 밖의 다른 그리스도교파들과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해 왔으며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긴밀하게 참여하며 활동했다. 상호 존중과 종교의 자유 정신에 입각하여 이슬람과 유대교 등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정의, 평화, 인권, 차별과 폭력, 광신주의 등 현대 세계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복음적 전망과 대안들을 제시하며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왔다. 특별히 전세계의 환경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녹색 총대주교”라는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