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온다는 3월 새벽녘,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효창동, 공덕동, 서계동 사이 만리시장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남대문시장에서 청과물 도매상을 하던 아버지가 파산함에 따라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겨 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종로구 현대그룹 계동 사옥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휘문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강남 개발 당시 명문고 강남 강제 이전 정책으로 졸업은 강남구 대치동에서 해야 했다. 고등학교는 북아현동에 소재한 한성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성북구 정릉에 있는 국민대 무역학과를 다녔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까지는 내부순환도로 밑에 있는 모래내 주변 판자촌에서 살았다. 그마저도 셋방을 전전하거나 무허가 건물에 살다가 강제철거를 당하는 등, 몇 번의 이사를 했는지 세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겪은 열등감은 그 어딘가에 생체학적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했던 방황과 고뇌는 그 상흔일지도 모른다.
가난으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가 지금까지 시민단체에서 일하게 하는 평생의 족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평생의 벗들을 만났다. 유명 정치인이 된 짝꿍, 산부인과 의사가 된 약국집 딸, 공기업 법률팀장인 기름집 아들, 벤처 1세대인 신발가게 아들, 일본 야쿠자가 되었다는 통장 아들,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인 배추가게 아들 등. 어렸던 우리들이 나름대로 힘을 가졌는데,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 불편함이 노동부 일자리 공시제 평가위원, 한국능률협회 자문위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 등으로 활동하는 것은 청년들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현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온다는 3월 새벽녘,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효창동, 공덕동, 서계동 사이 만리시장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남대문시장에서 청과물 도매상을 하던 아버지가 파산함에 따라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겨 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종로구 현대그룹 계동 사옥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휘문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강남 개발 당시 명문고 강남 강제 이전 정책으로 졸업은 강남구 대치동에서 해야 했다. 고등학교는 북아현동에 소재한 한성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성북구 정릉에 있는 국민대 무역학과를 다녔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까지는 내부순환도로 밑에 있는 모래내 주변 판자촌에서 살았다. 그마저도 셋방을 전전하거나 무허가 건물에 살다가 강제철거를 당하는 등, 몇 번의 이사를 했는지 세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겪은 열등감은 그 어딘가에 생체학적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했던 방황과 고뇌는 그 상흔일지도 모른다.
가난으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가 지금까지 시민단체에서 일하게 하는 평생의 족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평생의 벗들을 만났다. 유명 정치인이 된 짝꿍, 산부인과 의사가 된 약국집 딸, 공기업 법률팀장인 기름집 아들, 벤처 1세대인 신발가게 아들, 일본 야쿠자가 되었다는 통장 아들,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인 배추가게 아들 등. 어렸던 우리들이 나름대로 힘을 가졌는데,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 불편함이 노동부 일자리 공시제 평가위원, 한국능률협회 자문위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 등으로 활동하는 것은 청년들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현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으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