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당하기 직전의 노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당시 10대 소년이던 기하학자 테아이테토스와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토론을 벌인다. ‘어떤 것에 대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토론에서는 플라톤의 인식론이 다뤄진다. 테아이테토스는 지식에 대해 이런 대답을 한다. “누가 무엇을 감각적으로 지각할 때 그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한, 지식은 다름 아니라 감각적 지각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나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상대주의자의 견해가 엿보이는 대답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이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을 때 무언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이렇게 응수한다. “같은 바람이 부는데도 우리 가운데 누구는 차다고 느끼고 누구는 차지 않다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을 상세하게 비판하고 감각 경험에서 얻어지는 지각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고 주관에 따라 다른 내용을 가질 수 있으므로 결코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앎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답게 테아이테토스가 스스로 생각을 분만하도록 돕는 산파 구실을 하겠다고 자처한 소크라테스. 테아이테토스가 지식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계속 제시하게 하며 함께 ‘지식’(인식)을 탐구해간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가 지식으로 알거나 믿었던 지식은 불완전하거나 부분적이거나 착오에 지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밝혀지며, 그가 지식이라고 생각한 것이 지식이 될 수 없는 이유를 깨닫게 해준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정의하지 않으면서도 기존 지식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식 너머 있는 지식, 지식의 보편적 본질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드러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 서양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20세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을 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 후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기원전 387년에 철학 중심의 종합 학교인 아카데메이아를 세웠다.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글을 저술하며 그 안에 자신의 철학도 담았다. 「파이돈」 「크리톤」 「향연」 「국가」 「프로타고라스」 등 35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전부 대화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대화편』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저술 활동으로 남기지 않았기에 그의 사상을 엿보려면 플라톤의 『대화편』에 의존해야 한다. 초기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짙게 느낄 수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소크라테스 철학을 근간으로 한 플라톤 철학이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 서양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20세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을 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 후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기원전 387년에 철학 중심의 종합 학교인 아카데메이아를 세웠다.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글을 저술하며 그 안에 자신의 철학도 담았다. 「파이돈」 「크리톤」 「향연」 「국가」 「프로타고라스」 등 35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전부 대화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대화편』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저술 활동으로 남기지 않았기에 그의 사상을 엿보려면 플라톤의 『대화편』에 의존해야 한다. 초기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짙게 느낄 수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소크라테스 철학을 근간으로 한 플라톤 철학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