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무의 동몽선습, 주자의 동몽수지, 이이의 격몽요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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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6/12/20
Pages/Weight/Size 148*210*20mm
ISBN 9788991168534
Categories 인문 > 동양철학
Description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구나 지켜야 할 지침서!

과거의 어린이들은 보통 7~8세에 서당에 입학해서, 대략 15~16세까지 서당을 다녔다. 오늘날 같으면 중학교 과정까지 서당에서 마쳤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이 서당에서 공부하는 것은 보통 강독(講讀)과 제술(製述)과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고, 제술은 글짓기와 논술이며, 습자는 글씨 쓰기였다. 강독은 『천자문(千字文)』에서 시작해서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명심보감(明心寶鑑)』 『사서삼경(四書三經)』 『사기(史記)』 등 점차 그 수준이 높아졌다. 제술은 5언 절구나 7언 절구의 작문 등이 주를 이루었지만, 규모가 작은 서당에서는 아예 가르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학동들에게 『천자문』의 한 글자씩을 반복적으로 소리 내어 읽어서 글자를 암기하게 했다. 그 다음에 『동몽선습』 『계몽편(啓蒙篇)』 『동몽수지(童蒙須知)』 『격몽요결』 같은 책을 같은 방식으로 읽으면서 문장의 이치를 깨닫게 했고, 마지막으로 학동 스스로 그 뜻을 깊이 깨치도록 이끌었다. 따라서 『동몽선습』 『계몽편』 『동몽수지』 『격몽요결』 등은 사실상 어린이들의 필수 교재나 다름없었다.
『동몽선습』에서는 윤리와 도덕을 배우는 오륜(五輪)의 도리와, 중국의 역사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간단명료하게 밝혔고, 『계몽편』에서는 자연현상과 인간의 도리에 대해서 설명했으며, 『동몽수지』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갖추어야할 몸가짐과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열거했다. 또 『격몽요결』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뜻을 세우고, 부모를 봉양하며, 남을 대접할 줄 알고, 몸을 닦으며,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등에 대해 역설했다.
비록 이 책의 내용이 과거에는 어린이들이 배우는 것이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마음의 수양서가 되는 것이므로, 부단히 읽어서 마음의 거울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Contents
머리말

동몽선습(童蒙先習)
어제동몽선습서_동몽선습_부자유친_군신유의_부부유별_장유유서
붕우유신_총론_발문_필선채응복소

계몽편(啓蒙篇)
수편_천편_지편_물편_인편

동몽수지(童蒙須知)
동몽수지 _ 1.의복관구_2.언어보추_3.쇄소연결_4.독서문자_5.잡세사의

격몽요결(擊蒙要訣)
격몽요결서_1. 입지장_2. 혁구습장 _ 3. 지신장 _ 4. 독서장 _5. 사친장
6.상제장 _ 7.제례장 _ 8.거가장 _ 9.접인장 _ 10.처세장
Author
박세무,주자,이이,이창성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