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처럼 차가운 어느 날,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서양의 한 항구 도시에 자그마한 동양 노인이 내린다. 그가 목숨처럼 꽉 붙들고 있는 것은 작은 여행 가방 하나와 갓난쟁이 손녀딸뿐. 전쟁의 포화 속에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오로지 손녀 때문에 머나먼 망명길에 올랐다.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 낯선 땅, 처음 만나는 추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그는 모든 게 두렵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가 정신없이 흘러가는 인파를 피해 공원 벤치에 잠시 몸을 쉰다.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아내를 잃고 상심해 있는 바크 씨. 서로의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지만 둘 사이에는 이상한 우정이 싹튼다.
둘 사이의 우정과 소통은 언어를 매개로 한 것이 아니다. 둘은 서로의 상처, 다독거림, 마음, 시선, 음악, 그리고 침묵으로 소통한다. 필립 클로델은 작가로서 단어와 언어를 극한까지 추구해 비(非)언어적 의사소통을 문학 속에 구현했다. 이는 언어의 한계를 한번 넘어선 것일 뿐 아니라 말은 넘쳐 나지만 마음은 통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언어의 한계를 역으로 다시 한번 비춰준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고전적 문학 요소, 즉 열정, 아름답게 조탁한 문장, 그리고 올바른 메타포와 강렬한 심리 묘사로 두 남자의 특별한 우정을 그 어느 소설보다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