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후의 성리학자 간재 전우, 중용을 탐구하다》는 기호학파의 대미를 장식한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 간재 전우의 중용기의(中庸記疑)를 국역한 책이다. ‘기의’란 의심스러운 것을 항상 마음에 새긴 후 기록하는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전우가 '중용'을 탐구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 판본은 1차로 1999년 충남대학교 도서관에서 영인하고, 2차로 2004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하였다. 본서는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을 저본으로 하면서, 세 판본을 비교 교열하여 번역하였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담양이다. 1841년 전북 전주 청석리(靑石理)에서 태어나 13세 때까지 오서오경(五書五經)을 두루 읽다가 14세에 부친을 따라 서울 정동(貞洞)으로 옮겨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21세 때 부친의 명으로 충청도 아산(牙山)에서 강학활동을 하고 있는 낙론(洛論) 계열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문하에 나아가 유학사상을 익히며, 중국 송나라의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의 학문, 그리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학문을 면밀히 탐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우는 일본의 국권침탈을 목도하고서 육지에서의 활약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서해의 해도(海島)로 들어가 후학을 양성하고자 하는 결의를 보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그는 노구(老軀)임에도 왕등도(旺嶝島)와 고군산도(古群山島), 신시도(新時島) 등을 왕래하였다. 1913년 73세 때에는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육지에 근접한 계화도로 옮겨,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면서 성리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저서로는《간재집》(60책)·《간재사고(艮齋私稿)》(30책)·《추담별집(秋潭別集)》(2책) 등이 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담양이다. 1841년 전북 전주 청석리(靑石理)에서 태어나 13세 때까지 오서오경(五書五經)을 두루 읽다가 14세에 부친을 따라 서울 정동(貞洞)으로 옮겨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21세 때 부친의 명으로 충청도 아산(牙山)에서 강학활동을 하고 있는 낙론(洛論) 계열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문하에 나아가 유학사상을 익히며, 중국 송나라의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의 학문, 그리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학문을 면밀히 탐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우는 일본의 국권침탈을 목도하고서 육지에서의 활약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서해의 해도(海島)로 들어가 후학을 양성하고자 하는 결의를 보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그는 노구(老軀)임에도 왕등도(旺嶝島)와 고군산도(古群山島), 신시도(新時島) 등을 왕래하였다. 1913년 73세 때에는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육지에 근접한 계화도로 옮겨,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면서 성리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저서로는《간재집》(60책)·《간재사고(艮齋私稿)》(30책)·《추담별집(秋潭別集)》(2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