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는 희소성이다.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와 남아메리카의 잉까문명에는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사료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반면에 마야를 연구하기 위한 식민지 초기의 종합적인 1차 사료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마야문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책을 가장 먼저 찾게 된다. - 본문에서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Relacion de las cosas de Yucatan)》은 ??마야문명?? 하면 항상 따라붙는 가장 유명한 사료이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고 난 직후인 16세기, 가톨릭교회의 신부인 디에고 데 란다(Fray Diego de Landa)는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에게 선교 사업을 펼쳤다. 그리고 마야문명 정복의 역사부터 주변의 지리, 마야인들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성과 사랑, 인신공양 풍습, 건축, 문자, 음식, 의복, 환경 등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은 유럽 열강이 초기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대에 남겨진 마야문명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종합 사료이며 마야인들의 삶에 관한 종합적인 보고서로, 한마디로 말하면 마야문명 종합 백과사전이다.
굳이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이 책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합쳐 놓은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미 유럽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화로 사라진 고대 마야 원주민들의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가치를 찾는 교양의 의미에서, 마야문명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면 필수적인 사료라는 점에서 이 책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 책에는 마야인들이 남긴 문자의 발음기호 일부가 수록되었는데, 나머지 마야문자를 해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하였다.
Contents
머리말
주요 연표
이런저런 일러두기
약어 목록
1. 유까딴에 대한 묘사 - 다양한 계절에 대하여
2. 지역 이름의 유래와 이곳의 사정
3.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의 포로 생활 - 에르난데스 데 꼬르도바와 그리할바의 유까딴 탐험
4. 꼬르떼스의 꾸스밀 탐험 - 아길라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5. 유까딴 - 중요한 옛 건축물들
6. 꾸꿀깐 - 마야빤의 건립
7. 유까딴의 정부, 제사장, 과학, 문자와 책
7. 뚜뚤시우족 사람들의 도착과 이들이 마야빤 촌장들과 맺은 동맹 - 꼬꼼의 폭정과 몰락 그리고 마야빤의 쇠퇴
9. 마야빤의 연대기적 기념물 - 소뚜따 왕조의 건립 - 첼족의 기원 - 유까딴의 3대 주요 왕조
10. 정복 이전 유까딴에서 발생한 많은 재난: 태풍, 역병, 전쟁 등
11. 에스빠냐 사람들의 도착에 대한 예언들 - 유까딴 최초의 총독인 프란씨스꼬 데 몬떼호의 전기
12. 몬떼호가 유까딴을 항해하고 정복하다 - 첼족 사람들이 치첸이트사를 내주다 - 인디오는 자신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을 요구하다
13. 몬떼호가 사람들과 함께 유까딴을 떠나 멕시코로 향하다 - 그 후 아들 프란씨스꼬 데 몬떼호가 이 땅을 평정하다
14. 에스빠냐 사람들이 떠나고 난 후 유까딴의 상황 - 총독의 아들 돈 프란씨스꼬가 유까딴에 에스빠냐 정부를 다시 세우다
15. 원주민들에 대한 에스빠냐 사람들의 잔인함 - 그들은 (그 잔인함을) 어떻게 변명하였는가
16. 정복 이전 나라의 상태 - 반란 - 인디오들을 위한 왕의 칙령 - 총독의 죽음 - 그의 후손들
17. 에스빠냐 프란씨스꼬파 신부들의 유까딴 도착 - 인디오 보호조치의 실시 - 엔꼬멘데로(대농장주)들과의 분쟁
18. 인디오의 나쁜 습관들 - 신부들이 이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다 - 원주민들에 대한 교육 - 배교자들에 대한 벌
19. 또랄 오비스뽀(주교)의 도착 - 감옥의 인디오들을 독단적으로 석방시키다 - 프란씨스꼬 수도회 신부들의 활동을 정당화하려는 란다의 에스빠냐 방문
20. 유까딴의 집 짓는 방법 - 촌장들에 대한 인디오의 복종과 존경 - 머리를 꾸미고 옷을 입는 방식
21. 유까딴 인디오의 음식과 음료
22. 인디오의 그림과 문신 - 술에 취하기, 연회, 광대놀이, 음악과 춤
23. 산업, 교역, 화폐 - 농업과 종자 - 법률과 친절함
24. 유까딴 사람들의 수를 세는 방법 - 족보 - 고아들의 상속과 후견 - 촌장의 승계
25. 결혼 - 유까딴 사람들의 잦은 이혼 - 결혼식
26. 유까딴의 세례 방식 - 그것을 어떻게 거행하는가
27. 유까딴 사람들의 고해성사 - 금욕과 미신 - 다양한 많은 우상 - 제사장들의 임무
28. 잔인하고도 더러운 유까딴 사람들의 인신공양과 고행 - 화살을 쏘아 인간제물을 죽이다
29. 유까딴 사람들의 무기 - 군대의 장교들 - 병법과 병사들, 전쟁 풍습
30. 간음, 살인, 도둑질한 사람에 대한 징계와 형벌 -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 - 아이들의 머리를 평평하게 하는 관습(편두풍습)
31. 유까딴 여자 인디오들의 의복과 장식
32. 유까딴 여자 인디오들의 정절과 교육 - 그들의 높은 교양과 경제 - 출산과 관련된 신앙심과 특별한 관습들
33. 초상(初喪) - 제사장들의 매장 - 촌장들의 유골을 보관하는 조각상 - 조의 -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34. 유까딴의 연도 계산 - 날에 해당하는 문자들 - 네 명의 바깝과 그들의 이름 - 불길한 날들
35. 불길한 날들에 행하는 의례들 - 깐을 머리문자로 하는 새해의 공양
36. 물룩을 (머리)문자로 하는 새해의 공양 - 장대춤 - 흙으로 만든 개와 함께 추는 노파들의 춤
37. 익스(IX)를 (머리)문자로 하는 새해의 공양 - 불길한 예언과 그에 대한 대책
38. 까우악(CAUAC)을 (머리)문자로 하는 새해의 공양 - 불길한 예언과 그 대책으로써의 불춤
39. 달력에 대한 설명
40. 로마 달력과 유까딴 달력의 시작
41. 마야의 연도 - 그들의 문자
42. 유까딴의 많은 건축물 - 잇사말, 메리다, 치첸이트사의 건축물들
43. 인디오들은 왜 인신공양을 하였는가
44. 땅에서 나는 것들
45. 유까딴의 물고기
46. 이구아나와 악어
47. 뱀의 종류와 독을 가진 다른 동물들
48. 벌, 꿀, 밀랍
49. 유까딴의 식물
50. 육지와 바다의 새
51. 유까딴의 또 다른 동물들
52. 결론
참고문헌
Author
디에고 데 란다,송영복
16세기 마야 지역에서 활동한 가톨릭 신부이다. 초기 식민지 시대인 1549년 에스빠냐에서 멕시코로 건너가 그곳 원주민 포교와 저술 활동에 힘 쏟았다. 이때 마야 지역은 이미 에스빠냐 몬떼호 장군에게 1520년대 이후 정복되고 있었고, 40년대 이후로는 많은 지역이 에스빠냐의 복속 아래 놓였다. 따라서 저자인 란다 신부가 이곳에 도착했을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성당이 생기고 수도사들의 포교가 시작되고 있었다. 란다 역시 1552년 유까딴 지역의 과르디안(주임신부)으로의 부임을 시작으로 마야 원주민들과 인연을 맺었다. 원주민 포교를 위하여 신부들은 그들의 언어와 관습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란다도 그러한 필요 때문에 그들의 생활과 언어를 공부했다. 란다는 원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교류한 반면, 그들의 인신공양과 우상숭배 풍습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1572년에는 유까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란다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으로 마야문명에 관한 자세하고 광범위한 글을 남겼으나, 우상숭배의 죄목으로 수많은 원주민을 화형에 처했으며 마야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모조리 불태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란다는 마야의 문화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고발당하고 에스빠냐로 소환되어 조사까지 받았으나 관련자들을 설득하여 결국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이러한 과정에서 란다의 경험과 호기심, 실제적 필요로 탄생했다. 1573년에는 당시 유까딴 지역 가톨릭의 최고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메리다의 오비스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579년 멕시코의 유까딴 지방 메리다에서 사망했다.
16세기 마야 지역에서 활동한 가톨릭 신부이다. 초기 식민지 시대인 1549년 에스빠냐에서 멕시코로 건너가 그곳 원주민 포교와 저술 활동에 힘 쏟았다. 이때 마야 지역은 이미 에스빠냐 몬떼호 장군에게 1520년대 이후 정복되고 있었고, 40년대 이후로는 많은 지역이 에스빠냐의 복속 아래 놓였다. 따라서 저자인 란다 신부가 이곳에 도착했을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성당이 생기고 수도사들의 포교가 시작되고 있었다. 란다 역시 1552년 유까딴 지역의 과르디안(주임신부)으로의 부임을 시작으로 마야 원주민들과 인연을 맺었다. 원주민 포교를 위하여 신부들은 그들의 언어와 관습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란다도 그러한 필요 때문에 그들의 생활과 언어를 공부했다. 란다는 원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교류한 반면, 그들의 인신공양과 우상숭배 풍습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1572년에는 유까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란다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으로 마야문명에 관한 자세하고 광범위한 글을 남겼으나, 우상숭배의 죄목으로 수많은 원주민을 화형에 처했으며 마야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모조리 불태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란다는 마야의 문화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고발당하고 에스빠냐로 소환되어 조사까지 받았으나 관련자들을 설득하여 결국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이러한 과정에서 란다의 경험과 호기심, 실제적 필요로 탄생했다. 1573년에는 당시 유까딴 지역 가톨릭의 최고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메리다의 오비스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579년 멕시코의 유까딴 지방 메리다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