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권력의 칼날 위에 선 군주를 위한 제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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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0/08/23
Pages/Weight/Size 152*208*20mm
ISBN 9788974745561
Categories 청소년 > 청소년 철학/종교/윤리
Description
'순망치한', '수주대토', '토사구팽'등의 우리에게 익숙한 고사들과 '성악설'로 알려진 「한비자」에는 춘추 전국 시대의 현실 인식이 어느 책보다도 자세하게 담겨져있다. 하지만 유학을 정통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의 학문적 편식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분량의 방대함이나 내용의 밀도를 볼 때, 「한비자」에는 치열한 정치 투쟁과 복잡한 사회 상황이 전개되었던 전국 시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한비자』는 청소년에게 읽힐 수 있는 고전에 대한 고민 끝에 기획된 시리즈인 풀빛 '청소년 철학창고'의 24번째 책이다. 전작에서도 그래왔듯 고전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추되 원문이 주는 의미와 내용을 해지지 않도록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난무하던 전국시대의 한 복판에서 성악설과 강력한 군주를 중심으로 한 학설을 주장한 한비자의 사상을 통해 청소년들이 당시 시대의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Contents
'청소년 철학창고'를 펴내며
들어가는 말

1 이병(二柄, 두 개의 칼자루)
2 팔간(八姦, 여덟 가지의 간악함)
3 십과(十過, 열 가지의 잘못)
4 고분(孤憤, 홀로 분통을 터뜨리다)
5 세난(說難, 유세의 어려움)
6 화씨(和氏, 화씨의 옥 이야기)
7 망징(亡徵, 나라가 망할 징조)
8 삼수(三守, 군주가 지켜야 할 세 가지)
9 비내(備內, 권력의 내부를 단속하라)
10 세림(說林, 유세의 숲)
11 관행(觀行, 행동을 살펴라)
12 저설Ⅰ(儲說, 모아놓은 이야기들Ⅰ)
13 저설Ⅱ(儲說, 모아놓은 이야기들Ⅱ)
14 저설Ⅲ(儲說, 모아놓은 이야기들Ⅲ)
15 난세(難勢, 세에 대한 논란)
16 오두(나라를 좀먹는 다섯 가지의 벌레)

「한비자」, 마키아벨리즘의 선구자
Author
한비자,마현준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 출신으로 기원전 약 280년경 태어나 233년 세상을 떠났다. 원래 이름은 ‘한비’로 그의 이름을 높여 부른 것이 ‘한비자’이다. 그는 한나라 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이었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을 잘 꾸미지 못했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써 중국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이름난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법가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과 한 나라의 어려운 처지 안에서 발전했다. 약한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오직 엄한 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나라의 힘을 한 길로 동원함으로써 부강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글은 한나라의 군주에게는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진왕만은 한비자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 진시황이 진왕이던 시절, 한비자의 저술을 읽고는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감탄을 연발했다. 한을 공격하여 실제로 한비자를 만난 진왕은 자신의 통일 대업에 한비자의 도움을 얻고 싶어 했으나 그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그러다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이사의 모함을 받자 마음이 돌아서 한비자에게 사약을 보내고 만다.
사마천은 한비자의 죽음을 두고 “세난(說難, 유세와 설득의 어려움) 같은 훌륭한 글을 썼으면서도 자신은 그로 인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진왕은 한비자를 죽였으나 진시황이 된 뒤 한비자의 법술 이론에 큰 영향을 받고, 천하 통치의 이론적인 버팀목으로 활용했다.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 출신으로 기원전 약 280년경 태어나 233년 세상을 떠났다. 원래 이름은 ‘한비’로 그의 이름을 높여 부른 것이 ‘한비자’이다. 그는 한나라 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이었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을 잘 꾸미지 못했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써 중국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이름난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법가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과 한 나라의 어려운 처지 안에서 발전했다. 약한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오직 엄한 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나라의 힘을 한 길로 동원함으로써 부강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글은 한나라의 군주에게는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진왕만은 한비자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 진시황이 진왕이던 시절, 한비자의 저술을 읽고는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감탄을 연발했다. 한을 공격하여 실제로 한비자를 만난 진왕은 자신의 통일 대업에 한비자의 도움을 얻고 싶어 했으나 그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그러다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이사의 모함을 받자 마음이 돌아서 한비자에게 사약을 보내고 만다.
사마천은 한비자의 죽음을 두고 “세난(說難, 유세와 설득의 어려움) 같은 훌륭한 글을 썼으면서도 자신은 그로 인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진왕은 한비자를 죽였으나 진시황이 된 뒤 한비자의 법술 이론에 큰 영향을 받고, 천하 통치의 이론적인 버팀목으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