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십도

열 가지 그림으로 읽는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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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05/06/10
Pages/Weight/Size 140*212*20mm
ISBN 9788974745295
Categories 청소년 > 청소년 철학/종교/윤리
Description
<성학십도>는 노년의 퇴계 이황이 17세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성리학의 기본 이념을 열 개의그림으로 정리하여 올린 책이다. 열 폭밖에 안되는 짧은 그림과 글이지만 <성학십도>에는 퇴계가 평생 동안 공부하고 연구한 성리학의 핵심 내용과 실천 방안이 들어 있다.

<성학십도, 열 가지 그림으로 읽는 성리학>에는 청소년들이 조금이나마 원래 성학십도의 그림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는지, 그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전체 그림을 내용에 따라 나누고 그 부분을 하나하나 따로 떼어 풀이한 식이다. 순서에 따라 나누어진 부분을 번역과 함께 읽다 보면 한 폭의 그림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져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문도 최대한 쉽게 풀어쓴 뒤 해설을 덧붙여, 청소년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Contents
제3권 - 성학십도

'청소년 철학창고'를 펴내며
들어가는 말
<성학십도>에 나오는 주요 인물

<성학십도>를 올리는 이유
1. 태극도-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라
2. 서명도- 천지 만물과 하나가 되어라
3. 소학도- 일상적인 일에 충실하라
4. 대학도- 수신으로부터 시작하라
5. 백록동규도- 인간이 되는 학문을 하라
6. 심통성정도- 마음을 바르게 해라
7. 인설도- 인을 본체로 삼아라
8. 심학도- 잃어버린 본심을 찾아라
9. 경재잠도- 경의 세부 항목을 실천하라
10. 숙흥야매잠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하라

성인이 되기 위한 열 가지 그림, 성학십도
퇴계 이황 연보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