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불행하게도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近代)의 문을 열어젖히지 못했다. 이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당시를 조명한 많은 책들에서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되던 19세기의 우왕좌왕한 모습을 다루었다. ‘조선의 못난 개항’이란 이름의 책도 출간된 바 있다. 그렇다면 강제 개항 전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던가?
18세기와 19세기, 실학(實學)이 조선의 사상계에 넘쳐날 때, 북학파(北學派) 혹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라 불린 일군의 실학파 학자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홍대용, 박지원, 그리고 박제가이다. 이들은 강대국 조선을 꿈꿨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북학(北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사상을 가장 정밀하게 담아낸 책이 바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의 명저 『북학의』北學議이다.
『북학의』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출현한 수많은 명저 가운데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대한 저술이다. 당시 현실을 바탕으로 쓴 저술이면서도 역사를 넘어서는 보편적 사유를 담고 있어 지금도 여전히 문제적 시각을 보여 준다.
Contents
1장 왜 북학인가
강대국을 꿈꾼 젊은 선비 박제가
자서自序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
2장 북학의 논리
북학밖에는 길이 없다
북학의 필요성: 존주론 | 북학변 1 | 북학변 2 | 북학변 3
경제와 통상: 재부론 |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 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론
제도와 풍속의 개혁: 군사를 논한다 | 관직과 녹봉 | 풍수설과 장지
교육과 인재 선발: 과거론 1 | 과거론 2 | 정유년 증광시에 제출한 시사책
중국어 교육과 문명사회: 중국어 | 통역 | 골동품과 서화
4장 『북학의』의 평가
『북학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평가
북학의 서문 - 서명응
북학의 서문 - 박지원
Author
박제가,안대회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으며, 수염이 많았다. 농담을 잘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배이자 검서관 동료인 성해응(成海應)은 박제가 사후에 박제가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정은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여 남의 뒤를 좇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기 천성이 가는대로 스스로 터득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어 그 예리한 칼날을 거의 맞설 수 없었다. 그를 힐난하는 자가 나타나면 기어코 꺾으려 애썼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도 요란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끝내 덮어 버릴 수 없다.” 박제가의 오만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강한 자부심, 호승심(好勝心)을 지적했는데 그를 용납하지 않는 적을 많이 만들어 낸 요인을 성격과 자부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지적이다. 게다가 박제가는 서자였다.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서자인 처지에 이런 성격과 능력과 태도를 지녔으니, 그는 주변에 숱한 적을 만들면서 문예와 학문에 종사한 것이다. 『북학의』에 표출된 선명하고 선이 굵은 주장은 그런 성격과 태도에도 잘 부합한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으며, 수염이 많았다. 농담을 잘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배이자 검서관 동료인 성해응(成海應)은 박제가 사후에 박제가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정은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여 남의 뒤를 좇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기 천성이 가는대로 스스로 터득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어 그 예리한 칼날을 거의 맞설 수 없었다. 그를 힐난하는 자가 나타나면 기어코 꺾으려 애썼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도 요란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끝내 덮어 버릴 수 없다.” 박제가의 오만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강한 자부심, 호승심(好勝心)을 지적했는데 그를 용납하지 않는 적을 많이 만들어 낸 요인을 성격과 자부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지적이다. 게다가 박제가는 서자였다.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서자인 처지에 이런 성격과 능력과 태도를 지녔으니, 그는 주변에 숱한 적을 만들면서 문예와 학문에 종사한 것이다. 『북학의』에 표출된 선명하고 선이 굵은 주장은 그런 성격과 태도에도 잘 부합한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