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北學議

완역 정본
$31.75
SKU
9788971995525
+ Wish
[Free shipping over $100]

Standard Shipping estimated by Thu 05/16 - Wed 05/22 (주문일로부 10-14 영업일)

Express Shipping estimated by Mon 05/13 - Wed 05/15 (주문일로부 7-9 영업일)

* 안내되는 배송 완료 예상일은 유통사/배송사의 상황에 따라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Publication Date 2013/07/08
Pages/Weight/Size 158*232*35mm
ISBN 9788971995525
Categories 인문 > 한국철학
Description
최초의 원문 교감 작업을 통해 탄생한
완역 정본 『북학의』


『북학의』(北學議)는 조선의 경장(更張)을 꿈꾼 18세기 후반의 사상가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저술이다. 이 책은 선진적인 중국의 문물을 배워서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고 알려졌으나 그렇게 단순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 위기에 봉착한 조선 사회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분석과 자기부정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자 한 뼈아픈 자각과 통찰의 저작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학의』는 출간되지 않은 채 필사본으로 널리 읽혔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본의 수는 대략 20여 종을 웃돌지만, 비교적 조선의 대표적 글이라고 일컬어지는 『북학의』조차도 이제껏 원문 교감 작업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완역 정본 북학의』는 20여 종의 사본을 교감하고 주해하는 작업을 거쳐 탄생한, 말 그대로 ‘정본’(定本)이다. 이 책의 교감과 번역, 주석 작업을 한 안대회 교수는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국 등에 흩어져 있는 국외의 이본들을 모두 수집하여 교감 과정을 거쳐 정본을 만들고, 완역 작업을 이루었다. 『북학의』의 제대로 된 완역은 이 책이 최초이다.
Contents
책머리에 5
차례
일러두기

자서自序
북학의서_박지원
북학의서_서명응

북학의 내편 北學議 內編

수레 / 배 / 성 / 벽돌 / 기와 / 자기 / 삿자리 / 주택 / 창호 / 뜰 / 도로 / 교량 / 목축 / 소 / 말 / 나귀 / 안장 / 구유통 / 시장과 우물 / 장사 / 은 / 화폐 / 철 / 목재 / 여자의 의복 / 연극 / 중국어 / 통역 / 약 / 장 / 인장 / 담요 / 저보 / 종이 / 활 / 총과 화살 / 자 / 문방구 / 골동품과 서화 / 방아공이

북학의 외편 北學議 外編

밭 / 똥거름 / 뽕과 과일 / 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작두와 착유기의 제작 방법 / [부록] 이희경의 「농기도서」 / [부록] 용미차설 / 과거론 1 / 과거론 2 / [부록] 정유년 증광시에서 제출한 시사책 / 북학변 1 / 북학변 2 / 북학변 3 / 관직과 녹봉 / 재부론 / 강남 절강 상선과의 통상론 / 장지론 / 병론 / 존주론 /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

진상본 북학의 進上本 北學議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 / 수레 / 밭 / 똥거름 / 뽕 / 농기구 / 철 / 볍씨 / 곡식의 이름 / 지리 / 논 / 수리 / 전업 농부 / 구전 / 모내기 / 고구마 심기 / 말단의 이익 / 유생의 도태 / 둔전에 드는 비용 / 하천의 준설 / 창고 쌓기 / 배 / [부록] 노하운선기 / ‘오행을 잃고 버렸다’는 데 대한 생각 / 번지와 허행 / 장생불사의 방법 / 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론 / 재부론 / 강남 절강 상선과의 통상론 / 존주론

輯校(標點) 北學議

北學議 內編
北學議 外編
進上本 北學議

해제
박제가 연보
찾아보기
Author
박제가,안대회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으며, 수염이 많았다. 농담을 잘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배이자 검서관 동료인 성해응(成海應)은 박제가 사후에 박제가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정은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여 남의 뒤를 좇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기 천성이 가는대로 스스로 터득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어 그 예리한 칼날을 거의 맞설 수 없었다. 그를 힐난하는 자가 나타나면 기어코 꺾으려 애썼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도 요란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끝내 덮어 버릴 수 없다.” 박제가의 오만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강한 자부심, 호승심(好勝心)을 지적했는데 그를 용납하지 않는 적을 많이 만들어 낸 요인을 성격과 자부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지적이다. 게다가 박제가는 서자였다.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서자인 처지에 이런 성격과 능력과 태도를 지녔으니, 그는 주변에 숱한 적을 만들면서 문예와 학문에 종사한 것이다. 『북학의』에 표출된 선명하고 선이 굵은 주장은 그런 성격과 태도에도 잘 부합한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으며, 수염이 많았다. 농담을 잘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배이자 검서관 동료인 성해응(成海應)은 박제가 사후에 박제가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정은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여 남의 뒤를 좇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기 천성이 가는대로 스스로 터득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어 그 예리한 칼날을 거의 맞설 수 없었다. 그를 힐난하는 자가 나타나면 기어코 꺾으려 애썼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도 요란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끝내 덮어 버릴 수 없다.” 박제가의 오만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강한 자부심, 호승심(好勝心)을 지적했는데 그를 용납하지 않는 적을 많이 만들어 낸 요인을 성격과 자부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지적이다. 게다가 박제가는 서자였다.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서자인 처지에 이런 성격과 능력과 태도를 지녔으니, 그는 주변에 숱한 적을 만들면서 문예와 학문에 종사한 것이다. 『북학의』에 표출된 선명하고 선이 굵은 주장은 그런 성격과 태도에도 잘 부합한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