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는 국민 모두의 것입니다

헨리 조지의 명연설 9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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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2/12/12
Pages/Weight/Size 153*224*20mm
ISBN 9788971805961
Categories 사회 정치 > 사회학
Description
이 책은 19세기 미국의 토지개혁가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의 대표적 연설문 아홉 건의 번역을 담고 있다. 연설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므로 전달력이 높고 또 저서에 비해 분량도 길지 않아서, 헨리 조지 사상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적합하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가 연설문 본문 외에 간략한 해제와 함께 핵심 문장을 소개하였고 연설문마다 소제목과 각주를 추가하였다. 헨리 조지는 183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서부 개척, 남북전쟁, 대륙 횡단 철도, 과학과 산업의 발전 등 19세기 중·후반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살았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중등교육도 채 못 받고 소년기부터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절망적인 빈곤을 겪었다. 이런 환경과 체험을 통해, 사회가 눈부시게 발전하는데도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하는 일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게 되었다. 『진보와 빈곤』, 『사회문제의 경제학』, 『노동 빈곤과 토지 정의』 등 수많은 저서에 담긴 헨리 조지의 사상을 그의 연설문을 통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책 『국토는 국민 모두의 것입니다』는 기존에 경북대학교출판부에서 출간된 다섯 권짜리 소책자 헨리 조지 연설집(『헨리 조지에게 듣는다』)을 한 권으로 합친 것으로, 책 말미에 번역자의 최근 글 세 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헨리 조지가 살았던 19세기 미국이 아닌 21세기 한국의 상황에서 헨리 조지 사상을 되새겨 보는 내용이다.
Contents
머리말

1877
3월 9일,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제학 연구
The Study of Political Economy

7월 4일, 샌프란시스코
자유 예찬
Ode to Liberty

1878
6월 샌프란시스코의 히브리청년협회
모세
Moses

1884
2월 18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시청
스코틀랜드여, 일어나라
Scotland and Scotsman

1885
4월 1일, 아이오와주 벌링턴의 오페라 하우스
빈곤은 사회의 범죄
The Crime of Poverty

1887
5월 8일, 뉴욕의 음악원
도둑질하지 말라
Thou Shalt Not Steal

1889
4월 28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시청
나라가 임하시오며
Thy Kingdom Come

7월 11일, 아일랜드 데리 카운티의 소도시 툼브리지
토지를 국민에게
The Land for the People

1890
2월 4일, 샌프란시스코의 메트로폴리탄 홀
정의는 목적, 과세는 수단
Justice the Object-Taxation the Means

헨리 조지 연보

부록: 오늘의 한국과 헨리 조지 사상
[부록 1]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과 그 도입 전략
[부록 2] 지공주의(地公主義): 화합과 평화의 길
[부록 3] 토지사유제 개혁, 국민이 지지할까?
Author
헨리 조지,김윤상
미국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공립학교를 다니다 성공회 학교로 전학한 헨리는 이후 집에서 자율 학습을 하다가 사립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4세에 중퇴했다. 이후 점원 생활을 하다가 〈힌두〉호의 사환 선원으로 호주 멜버른과 인도의 캘커타를 경유하는 화물선에 승선했다. 그후 필라델피아 인쇄소에서 식자공으로 일했다. 1858년에는 미국 서부로 갔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금광 사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인쇄소의 식자공 생활을 했다.

애니 폭스와 결혼을 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신문 『타임스』의 식자공으로 취직한 그는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아 기자로 발탁되었고, 1867년에는 편집장이 되었다. 그후 여러 신문사에서 일했는데, 자신이 창간한 신문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포스트』의 편집인으로 4년간 일했다(1871-1875).
조지는 1879년 『진보와 빈곤』을 발간하여 큰 명성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유명한 시국 연설가가 되었다. 1880년 뉴욕으로 이사 가서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조직과 접촉하게 되었다. 1881-1882년 사이에 영국과아일랜드에서 순회강연을 했다.

조지는 1883년 〈노동기사단〉에 가입하면서 더 많은 지지 세력을 얻게 되었다. 1886년 연합노동당 후보로 뉴욕 시장 선거에 나섰으나 2위를 기록하고 당선에 실패했다. 조지는 토지 공유제와, 지대와 빈곤의 상관관계 등에 대하여 강연 여행을 다니다가, 1890년에 가벼운 뇌졸중을 맞았다. 1897년 뉴욕 시장 선거에 또다시 출마했지만, 선거의 스트레스는 그에게 두 번째 뇌졸중을 일으켰고, 그는 선거일 나흘을 앞두고 사망했다.

헨리 조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과 맞서 싸우면서 가난을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 결과를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그는 그의 사상을 실제 세상에서 실현시키기 위하여 뉴욕 시장 선거에 두 번이나 도전했는데, 그것이 몸에 무리를 가져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그의 나이 58세였다. 단일세(Single tax)라고도 불리는 토지가치세의 주창자였으며, 조지주의(Georgism)라고 불리는 경제학파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공립학교를 다니다 성공회 학교로 전학한 헨리는 이후 집에서 자율 학습을 하다가 사립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4세에 중퇴했다. 이후 점원 생활을 하다가 〈힌두〉호의 사환 선원으로 호주 멜버른과 인도의 캘커타를 경유하는 화물선에 승선했다. 그후 필라델피아 인쇄소에서 식자공으로 일했다. 1858년에는 미국 서부로 갔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금광 사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인쇄소의 식자공 생활을 했다.

애니 폭스와 결혼을 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신문 『타임스』의 식자공으로 취직한 그는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아 기자로 발탁되었고, 1867년에는 편집장이 되었다. 그후 여러 신문사에서 일했는데, 자신이 창간한 신문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포스트』의 편집인으로 4년간 일했다(1871-1875).
조지는 1879년 『진보와 빈곤』을 발간하여 큰 명성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유명한 시국 연설가가 되었다. 1880년 뉴욕으로 이사 가서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조직과 접촉하게 되었다. 1881-1882년 사이에 영국과아일랜드에서 순회강연을 했다.

조지는 1883년 〈노동기사단〉에 가입하면서 더 많은 지지 세력을 얻게 되었다. 1886년 연합노동당 후보로 뉴욕 시장 선거에 나섰으나 2위를 기록하고 당선에 실패했다. 조지는 토지 공유제와, 지대와 빈곤의 상관관계 등에 대하여 강연 여행을 다니다가, 1890년에 가벼운 뇌졸중을 맞았다. 1897년 뉴욕 시장 선거에 또다시 출마했지만, 선거의 스트레스는 그에게 두 번째 뇌졸중을 일으켰고, 그는 선거일 나흘을 앞두고 사망했다.

헨리 조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과 맞서 싸우면서 가난을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 결과를 『진보와 빈곤』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그는 그의 사상을 실제 세상에서 실현시키기 위하여 뉴욕 시장 선거에 두 번이나 도전했는데, 그것이 몸에 무리를 가져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그의 나이 58세였다. 단일세(Single tax)라고도 불리는 토지가치세의 주창자였으며, 조지주의(Georgism)라고 불리는 경제학파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