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대한민국은 ‘박준영’이라는 이름 덕분에 몹시 뜨거웠다.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사건, 익산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의 재심을 청구한 변호사가 ‘사회적 약자’들을 돕다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포털사이트의 소셜펀딩 기사를 통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밤새 변론 준비를 하고, 한여름 땡볕에 혼자 앰프를 끌고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이 열혈 변호사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다.
박준영 변호사가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으려는 이들은 대개 힘없고, 가난하고, 지적장애가 있거나 미성년자인 상태로 피고인이 되었다. 짓지 않은 범죄를 자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위해 재심을 청구하고 공권력의 잘못된 판단과 싸워 나가는 박준영의 모습을 보고 많은 시민들이 응원을 보냈다.
시국 사건도 아니고, 일반 형사 사건의 재심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뒤엎고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청구를 성공시켰다. 그것도 몇 건이나.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그래도 한번 해 보자!’고 나서 준 박준영 변호사 덕분에 억울한 사법 피해자들은 명예를 되찾았고,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그 결과를 반겼다. 박준영이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나라 사법 역사의 새로운 길이 되고 있다.
Contents
프롤로그-목숨보다 소중한 내 새끼 진우에게
1부 나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남들은 나를 꼴통이라 해도
78일 동안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 저 이렇게 잘살고 있습니다
엄마, 걱정하지 마요
새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믿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내 사랑 똥만이
2부 재심을 청구합니다
재심 전문 변호사로 살아간다는 것
재심이 열리기까지의 시간
변호사 인생의 변곡점, 수원 노숙 소녀 살인 사건
무기수 김신혜의 다시 재판받을 권리
보호받지 못한 자들의 거짓 자백 현장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열다섯 살 소년의 진실
수원, 삼례, 익산, 그리고 그 다음
재심, 다시 재판받을 권리
우리 현실에 맞는, 실천 가능한 형사 사법 개선안
- 사건일지 1: 수원 노숙 소녀 살인 사건
- 사건일지 2: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 사건일지 3: 익산 택시 기사 살인 사건
3부 모두가 정의를 바란다
흉악한 살인범을 변호한다는 것
오원춘 사건에서 무엇을 배웠나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
‘간첩’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변호사
살인범과 호형호제한다는 것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의심
마음을 얻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
합리적 사고의 맹점과 이점
자립이 힘든 사람들에게 자립을 요구하는 모순
도움받고 의지했던 사람들
4부 당신들이 사과해야 하는 이유
검사는 몰랐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무죄를 요구할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재소자 인권, 어디쯤 와 있나?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들
에필로그-우리 승리하리라
부록
1. 최종 변론
- 최종 변론 1: 수원 노숙 소녀 살인 사건
- 최종 변론 2: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 최종 변론 3: 익산 택시 기사 살인 사건
2. 박준영이 살아온 길
Author
박준영
땅끝에서 배를 타고 30분 들어가야 하는 섬 ‘노화도’에서 태어났다. 남다른 사춘기를 보냈다. 가출을 자주 하며 왕십리 프레스 공장, 동인천 정비 단지에서 ‘꼬마’로 일했다. 군 제대 후 한 달 선임 배 병장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에 무작정 들어가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1점 차’로 합격했다. 학력, 경력, 인맥이 딸려 사건 수임이 어려웠다. 불가피하게 국선을 많이 하게 됐고, ‘국선 재벌’로 불리기도 했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사건을 많이 하다 보니 “법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갖게 되었다. 형사 사법 피해자들의 재심 사건에 관심이 갔고, 언제부턴가 전념하게 됐다.
2015년 제3회 변호사공익대상을 받았으나 파산할 뻔했다. 2016년 8월 ‘백수 기자’ 박상규와 진행한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기획으로 기사회생했다. ‘바보 변호사’, ‘시민 변호사’, ‘우리들의 작은 영웅’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동안 똑바로 살아야 하는데, 부담이 크다.
땅끝에서 배를 타고 30분 들어가야 하는 섬 ‘노화도’에서 태어났다. 남다른 사춘기를 보냈다. 가출을 자주 하며 왕십리 프레스 공장, 동인천 정비 단지에서 ‘꼬마’로 일했다. 군 제대 후 한 달 선임 배 병장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에 무작정 들어가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1점 차’로 합격했다. 학력, 경력, 인맥이 딸려 사건 수임이 어려웠다. 불가피하게 국선을 많이 하게 됐고, ‘국선 재벌’로 불리기도 했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사건을 많이 하다 보니 “법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갖게 되었다. 형사 사법 피해자들의 재심 사건에 관심이 갔고, 언제부턴가 전념하게 됐다.
2015년 제3회 변호사공익대상을 받았으나 파산할 뻔했다. 2016년 8월 ‘백수 기자’ 박상규와 진행한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기획으로 기사회생했다. ‘바보 변호사’, ‘시민 변호사’, ‘우리들의 작은 영웅’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동안 똑바로 살아야 하는데, 부담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