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동체를 향한 대장정

국민문화연구소와 함께한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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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2/09/27
Pages/Weight/Size 153*225*25mm
ISBN 9788961474184
Categories 사회 정치 > 사회학
Description
20세기 후반 한국 자유공동체운동의 생생한 역사

이 책은 현재 생존해 있는 한국 아나키스트 중 최고령인 수민 이문창 선생(1927년생 95세)이 (사)국민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전개한 20세기 후반 자유공동체운동의 대장정(아나키즘 실천 운동)을 현장에서의 실천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저술한 것이다.

이문창 선생은 2008년에 해방 후 약 10년간의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투쟁과 활동을 그린 『해방 공간의 아나키스트』(이학사)를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해방 공간의 아나키스트』에 이어 그후 약 50년간의 아나키스트들과 학생들, 활동가들의 사회운동을 그린 것이다.

권력 부정과 자유 탈환을 신조로 항일 투쟁을 하던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해방이 되자 크게 두 그룹, 즉 신사회 건설 운동에 중점을 둔 자유사회건설자연맹과 정치운동에 중점을 둔 독립노농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두 그룹 모두 해방 정국에서 여러 활동이 좌초를 겪음으로써 전자는 주로 교육계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대중 계몽에 전념하였다(후자의 정치 실험도 실패로 끝나고 그후 그 역할이 민주사회당, 민주통일당 등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1947년) 위당 정인보, 회관 이을규(임정 국무위원), 우관 이정규(독립운동가), 수주 변영로, 수곡 유정렬 등 주요 인사 10여 명이 모여서 교육 계몽 활동을 위해 설립한 것이 국민문화연구소였다(이때 지은이 이문창도 약관 20세에 참여함).
Contents
책머리에

서장: 자주협동이 우리의 길이다

1장 폐허 위에서의 사회운동 설계

민주사회주의와 혁신정당운동
또 하나의 아나키스트 정당
민주사회당의 조직 원리와 노선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현황
자유공동체운동의 맹아 ― 농촌자치운동
4?19혁명의 봉화와 더불어
5?16 군사 쿠데타 발발

2장 전원 · 공장 · 작업장의 모형을 목표로

문화반 조직부터
진건면 모습
농촌의 현실과 농촌운동의 목표
국민문화연구소 재건 총회
손으로 생각하라
향토애에 불타는 오룡골 청년들
사회단체 등록 제1호
공개 활동 제1성 ‘국민문화교양강좌’
농촌운동의 뉴프론티어 ‘진건수산센터’ '설립
자유공동체운동의 선구자 ― 아나키스트들과 학생들

3장 낙원동 시절

새 보금자리에서
대학생 향토 활동 지도
우관 선생의 사상의 편린
금곡수산기술훈련원
낙원동 시절의 우관과 나
『한국아나키즘운동사』 편찬 착수

4장 농촌자치운동과 생활협동운동

학생들 눈에 비친 새마을운동
도봉산 간담회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 발족
실험소비조합 발족
농산물 유통 과정과 출하조합
일본 소비자생활협동조합 연수 여행
남서울지부
그 뒷이야기

5장 시련을 헤치고

민주화운동의 서막과 통일민주당
공평동 옥상 사무실 풍경
가네코 후미코 묘비 제막식
사상 서적 출판 활동
국제 교류의 문이 열리다
시련 속의 교육 문화 활동
아나키즘운동사 발간과 자주인연맹
세대교체와 우관의 서거

6장 21세기의 길목에서

세계평화국제회의와 자유사회사상 연구
재일 동포 인권 투쟁 연대
재중 동포 청소년을 위한 민족문고 사업
누구를 위한 산업화인가?
통일 문제와 자유공동체운동

종장: 갈 길은 멀다

책을 마치며

참고 문헌
찾아보기
Author
수민 이문창
1927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하고 신식 교육을 받은 후, 10대 후반에 아나키즘운동에 투신, 평생을 아나키스트로서 자주학습운동, 문화교양운동, 농촌운동, 자유공동체운동 등 사회운동에 헌신한, 해방 후 한국 사회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의 산증인이다. 1943년 서울 청파동 광제한약국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문창은 그후 반탁운동에 가담한 것을 계기로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산하의 흑백회에 참여하며 사회운동을 시작하였다. 1947년 초에는 한국혁명위원회 활동에 참여하고, 1948년에는 설형회 조직에 참여하여 자주학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50년 서울이 3개월 동안 북한군 치하에 있는 동안에는 레지스탕스로서 반전 반공산 민중지하운동을 펼쳤다. 또한 부산 피난 중에는 외군부대 노동자의 문화교양운동을 주도하고, 군에 강제 징집되어 가서는 전쟁에 반대하며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21일간의 단식을 하였으며, 1954년에는 서울에서 환력학원, 근로청소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7년 발족 당시부터 국민문화연구소(문교부 사회단체 등록 제1호)에 참여한 이문창은 국민문화연구소의 농촌운동, 수산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 등에 헌신하며, 국민문화연구소의 이사(1964~1983년), 부회장(1983~1990년), 회장(1990~2003년)을 지냈다.
국제통신사 외신기자(1956년)와 경제통신사 외신기자(1959년)를 지내기도 한 이문창은 한국자주인연맹대회(1987년) 간사로 피선되고, 세계평화국제회의(1988년) 사회를 보았으며, 광복 50주년 기념 한국자유사회운동 국제학술회의(1995년)를 주재하였다.
1988년 제1회 우관상을 수상한 이문창은 지금도 국민문화연구소 명예회장, 박열의사기념사회 이사, 자유공동체연구회 상임고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2006년부터는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유공동체운동과 동아시아의 미래"를 주제로 한일 공동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1927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하고 신식 교육을 받은 후, 10대 후반에 아나키즘운동에 투신, 평생을 아나키스트로서 자주학습운동, 문화교양운동, 농촌운동, 자유공동체운동 등 사회운동에 헌신한, 해방 후 한국 사회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의 산증인이다. 1943년 서울 청파동 광제한약국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문창은 그후 반탁운동에 가담한 것을 계기로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산하의 흑백회에 참여하며 사회운동을 시작하였다. 1947년 초에는 한국혁명위원회 활동에 참여하고, 1948년에는 설형회 조직에 참여하여 자주학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50년 서울이 3개월 동안 북한군 치하에 있는 동안에는 레지스탕스로서 반전 반공산 민중지하운동을 펼쳤다. 또한 부산 피난 중에는 외군부대 노동자의 문화교양운동을 주도하고, 군에 강제 징집되어 가서는 전쟁에 반대하며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21일간의 단식을 하였으며, 1954년에는 서울에서 환력학원, 근로청소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7년 발족 당시부터 국민문화연구소(문교부 사회단체 등록 제1호)에 참여한 이문창은 국민문화연구소의 농촌운동, 수산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 등에 헌신하며, 국민문화연구소의 이사(1964~1983년), 부회장(1983~1990년), 회장(1990~2003년)을 지냈다.
국제통신사 외신기자(1956년)와 경제통신사 외신기자(1959년)를 지내기도 한 이문창은 한국자주인연맹대회(1987년) 간사로 피선되고, 세계평화국제회의(1988년) 사회를 보았으며, 광복 50주년 기념 한국자유사회운동 국제학술회의(1995년)를 주재하였다.
1988년 제1회 우관상을 수상한 이문창은 지금도 국민문화연구소 명예회장, 박열의사기념사회 이사, 자유공동체연구회 상임고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2006년부터는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유공동체운동과 동아시아의 미래"를 주제로 한일 공동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