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76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출판사 뿌리깊은나무 주인으로, 1976부터 1980년까지 월간 『뿌리깊은나무』의 발행-편집인으로, 또 1984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월간 『샘이깊은물』의 발행-편집인으로 일하며 두 월간 잡지를 통해 언론과 문화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민속, 미술, 예악, 언어, 건축, 복식 할 것 없이 역사와 오늘을 잇는 분야에서 한반도 전통 문화 가치의 탐색에 몰두했던 인물이다.
그는 1936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광주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대학교 법과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자신의 진로가 법조계가 아님을 깨닫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 팔군 영내에서 미국인들에게 귀국용 비행기표와 영어 성경책을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시카고의 엔사이클로피디어브리태니커 사에서 한국 땅에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 보급했으며, 1968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 몸담아 그 첫 몇 년 동안을 빼고는 줄곧 대표이사로 일했다.
그의 업적은 관념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구현되는 것이었다. 뜨거운 전통 음악 사랑으로 이 나라에서 해방 후로 1970년대까지 낡은 가치의 예술로 여겨 부끄러워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판소리를 다시 한반도 남반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고 즐기는 음악으로 되살려 내었으며 똑같은 곡절로 낡은 생활의 상징으로 여겨 내다 버리던 놋그릇, 백자 그릇을 오늘의 생활에 어렵사리 되살려내기도 했다. 또한 세계와 환경과 인류의 걱정거리에 일찍이 눈을 떠서 스승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삶의 큰 몫을 빼어난 전통 가치의 세계화와 탁월한 세계 가치의 한국화에 바쳤고, 남다른 심미안과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문화 비평과 문명 비평을 글로, 입으로 남겼다.
그는 또한 한국어를 통찰한 언어학자였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이 이 나라 새 세대가 사용할 언어의 흐름을 새 방향으로 바꾸었다고 다들 인정하는 것은, 그가 타고난 언어의 통찰력으로 한국어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 할 그 짜임새를 올바로 응용하고 발견하고 복원하여, 논리와 이치에 알맞은 글을 한국인들에게 제시하고자 힘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97년 예순 한 살로 세상을 떠난 그를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 예술을 남달리 깊이 알고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1976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출판사 뿌리깊은나무 주인으로, 1976부터 1980년까지 월간 『뿌리깊은나무』의 발행-편집인으로, 또 1984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월간 『샘이깊은물』의 발행-편집인으로 일하며 두 월간 잡지를 통해 언론과 문화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민속, 미술, 예악, 언어, 건축, 복식 할 것 없이 역사와 오늘을 잇는 분야에서 한반도 전통 문화 가치의 탐색에 몰두했던 인물이다.
그는 1936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광주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대학교 법과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자신의 진로가 법조계가 아님을 깨닫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 팔군 영내에서 미국인들에게 귀국용 비행기표와 영어 성경책을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시카고의 엔사이클로피디어브리태니커 사에서 한국 땅에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 보급했으며, 1968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 몸담아 그 첫 몇 년 동안을 빼고는 줄곧 대표이사로 일했다.
그의 업적은 관념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구현되는 것이었다. 뜨거운 전통 음악 사랑으로 이 나라에서 해방 후로 1970년대까지 낡은 가치의 예술로 여겨 부끄러워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판소리를 다시 한반도 남반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고 즐기는 음악으로 되살려 내었으며 똑같은 곡절로 낡은 생활의 상징으로 여겨 내다 버리던 놋그릇, 백자 그릇을 오늘의 생활에 어렵사리 되살려내기도 했다. 또한 세계와 환경과 인류의 걱정거리에 일찍이 눈을 떠서 스승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삶의 큰 몫을 빼어난 전통 가치의 세계화와 탁월한 세계 가치의 한국화에 바쳤고, 남다른 심미안과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문화 비평과 문명 비평을 글로, 입으로 남겼다.
그는 또한 한국어를 통찰한 언어학자였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이 이 나라 새 세대가 사용할 언어의 흐름을 새 방향으로 바꾸었다고 다들 인정하는 것은, 그가 타고난 언어의 통찰력으로 한국어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 할 그 짜임새를 올바로 응용하고 발견하고 복원하여, 논리와 이치에 알맞은 글을 한국인들에게 제시하고자 힘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97년 예순 한 살로 세상을 떠난 그를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 예술을 남달리 깊이 알고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