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을 계승한 동한의 황실에서는 새로운 통치사상을 찾고자 다양하게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의 법가, 서한 초의 황로학과 유학이 모두 한계를 노정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점차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또한 불교의 교의가 대제국의 통치에 적합한 사상적 내용을 충분하게 갖추고 있음을 빠르고 충분하게 파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여 년의 준비작업을 거쳐 드디어 황실에서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민중에 '이식'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는데, 그 표지가 바로 안세고와 지루가참의 역경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경전이 존재해야만 이른바 '이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불교는 그 초전의 상황부터 철저하게 '경세'의 필요에 의하여 수용된 것이고, 이러한 성격은 전체적인 중국불교사를 통하여 견지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식'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어 불교는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중국민중이 깊이 신앙하는 대종교의 면모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당연히 뛰어난 고승대덕들의 활약이 두드러지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재가 거사들의 역할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절대권력을 가진 황권에서는 교의의 발전보다는 '경세'의 유용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고, 그것을 중재할 수 있는 입장을 가진 이들이 바로 '거사'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