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산문답

천지와 인물에 대한 일탈적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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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9/07/30
Pages/Weight/Size 152*214*20mm
ISBN 9788957336380
Categories 인문 > 한국철학
Description
일반적으로 『의산문답』은 홍대용이 실옹(實翁)과 허자(虛子)라는 두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이들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과학 사상을 전개하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우주의 원리뿐만 아니라 천체와 기상 현상, 인류 역사의 탄생 등 천문, 역법, 산술, 지질학 등 자연과학 분야의 다양한 이론이 전개된다. 특히 홍대용이 땅이 원형(구형)임을 주장하고 무한우주에서의 다세계설을 펼치는 사색의 근대성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의 역해자 문중양 교수에 따르면 『의산문답』은 당대의 시공간의 맥락을 살펴서 읽어야 한다. 독자 자신이 서 있는 시공간적 위치에서 읽어서는 안 되며 가능하면 독자가 가진 근대 학문의 필터를 지우고 텍스트가 쓰인 오래전 당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럴 때 텍스트의 저자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놀라운 통찰력이 담겨 있고, 전통 유교의 성리학과 근대적인 서양과학 사이에 서 있는 홍대용 자신의 두 가지 면모를 당시 조선의 맥락 하에서 흥미롭게 풀어낸다.
Contents
해제 천지와 인물에 대한 ‘일탈적’ 우화

1부 헛된 공부였음을 인정하다
1. 세상을 등지고 의무여산에 은거할 뜻을 품다
2. 지난 공부의 헛됨을 반성하고 가르침을 청하다
3. 사람이 사물과 다른 이치에 대해 묻고 논하다

2부 우주의 새로운 원리를 살펴보다
4. 기(氣)에서 우주가 생성되다
5. 땅은 구형이다
6. 지구의 메커니즘 우주의 무상하와 지면 위의 상하의 형세
7. 지구의 모두가 정계(正界)
8. 지전이 어떻게 가능한가
9. 서양의 지동설 부정에 대하여
10. 티코 모델에서 무중심의 우주 모델로의 전환
11. 고리 모양의 수 많은 은하계를 상상하다 또 다른 세계의 공간
12. 소옹의 원회운세설을 부정하다
13. 다른 세계를 유력(遊歷)하고픈 허자의 욕망을 질타하다
14. 지구는 왜 자전만 하나 무겁고 둔하기 때문이다

3부 천체와 기상 현상을 살펴보다
15. 고전적 천문관을 비판하고 분야설을 수정하다
16. 달 가운데 명암의 형상을 묻다
17. 하늘의 구조와 별들의 운행에 대하여
18. 요사한 별과 오행성의 밝기에 대하여
19. 일식과 재이론에 대하여
20. 기상 현상 1 바람·구름·비·눈·서리·우박·천둥·번개·무지개·무리
21. 기상 현상 2 청몽기차에 대하여
22. 기상 현상 3 지구설과 햇빛의 경사각에 의한 기후의 차이
23. 음양오행설과 인물의 근원으로서 태양 불의 역할

4부 땅에 대하여 논하다
24. 북고남저의 지세
25. 낮과 밤의 지역 간 장단에 대하여
26. 바다와 조석에 대하여
27. 지각 변동에 대하여 산 위의 조개껍질과 곤과 우의 치수 사업
28. 땅은 활물(活物)이다
29. 음택풍수와 적절한 장례법
30. 음택풍수와 동기감응에 대하여

5부 인류 역사를 새로 쓰다
31. 천지 생성 이후 인류 사회의 탄생
32. 중화 문명의 부침의 역사
33. 중화와 이적은 같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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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홍대용,문중양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1731년에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 마을에서 홍력(洪?)과 청풍 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1742)에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나아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수학했다. 16세(1746)에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훗날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거문고의 명수’라고 칭찬했다.
21세(1751) 여름에, 윤증(尹拯)의 글을 읽고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해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고 윤증의 주장에 동조했다.
24세(1754) 봄에, 김원행 문하생인 주도이(周道以)의 초상에 조문했으며 5월에 석실서원에서 김원행에게 ≪소학≫을 배웠다.
25세(1755)에 스승 김원행을 찾아온 박지원을 만났다. 훗날 홍대용이 중국을 다녀온 뒤 둘은 더욱 가깝게 교유했다.
26세(1756) 9월에 <봉래금사적(蓬萊禁事蹟)>을 지었다. 석실서원에서 황윤석(黃胤錫)을 만났다.
28세(1758)에 부친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는 데 따라가 나주 향약과 <권무사목(勸武事目)>에 대한 서문을 지었다.
29세(1759)에 전남 화순군 이서면의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한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교유하며 혼천의와 자명종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3년 후,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하고 고향 집에 농수각(籠水閣)을 짓고 혼천의와 자명종을 보관했다.
32세(1762)에 부친이 환곡에 관한 일로 예천(醴泉)에 5년간 금고형에 처해졌다.
35세(1765) 11월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인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을 수행해 연경에 갔다.
36세(1766)에 연경에서 항주에서 온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 등을 만나 형제의 의리를 맺었다. 6월, 돌아와 그간의 필담과 주고받은 서찰을 엮은 <건정동회우록(乾淨?會友錄)>과 <항전척독(杭傳尺牘)>을 완성했다.
37세(1767)에 ≪해동시선(海東詩選)≫을 완성해 항주의 반정균에게 보냈다. 11월, 부친상을 당한 후 과거를 단념했다.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교유했다.
38세(1768)에 엄성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을 지어 보냈다.
42세(1772) 7월에 스승 김원행이 사망했다.
43세(1773)에 ≪의산문답(醫山問答)≫과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했다.
44세(1774) 봄에, 이송(李淞)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다.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繕工鑑監役),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에, 12월,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 侍直)에 임명되었다.
46세(1776) 3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임명되었다.
47세(1777) 7월에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49세(1779) 12월에 영천군수(榮川郡守)에 임명되었다.
53세(1783) 5월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10월 23일에 중풍으로 사망했다. 12월, 청주 구미평(龜尾坪)에 장사 지냈고 박지원이 묘지명을 지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1731년에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 마을에서 홍력(洪?)과 청풍 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1742)에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나아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수학했다. 16세(1746)에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훗날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거문고의 명수’라고 칭찬했다.
21세(1751) 여름에, 윤증(尹拯)의 글을 읽고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해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고 윤증의 주장에 동조했다.
24세(1754) 봄에, 김원행 문하생인 주도이(周道以)의 초상에 조문했으며 5월에 석실서원에서 김원행에게 ≪소학≫을 배웠다.
25세(1755)에 스승 김원행을 찾아온 박지원을 만났다. 훗날 홍대용이 중국을 다녀온 뒤 둘은 더욱 가깝게 교유했다.
26세(1756) 9월에 <봉래금사적(蓬萊禁事蹟)>을 지었다. 석실서원에서 황윤석(黃胤錫)을 만났다.
28세(1758)에 부친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는 데 따라가 나주 향약과 <권무사목(勸武事目)>에 대한 서문을 지었다.
29세(1759)에 전남 화순군 이서면의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한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교유하며 혼천의와 자명종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3년 후,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하고 고향 집에 농수각(籠水閣)을 짓고 혼천의와 자명종을 보관했다.
32세(1762)에 부친이 환곡에 관한 일로 예천(醴泉)에 5년간 금고형에 처해졌다.
35세(1765) 11월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인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을 수행해 연경에 갔다.
36세(1766)에 연경에서 항주에서 온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 등을 만나 형제의 의리를 맺었다. 6월, 돌아와 그간의 필담과 주고받은 서찰을 엮은 <건정동회우록(乾淨?會友錄)>과 <항전척독(杭傳尺牘)>을 완성했다.
37세(1767)에 ≪해동시선(海東詩選)≫을 완성해 항주의 반정균에게 보냈다. 11월, 부친상을 당한 후 과거를 단념했다.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교유했다.
38세(1768)에 엄성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을 지어 보냈다.
42세(1772) 7월에 스승 김원행이 사망했다.
43세(1773)에 ≪의산문답(醫山問答)≫과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했다.
44세(1774) 봄에, 이송(李淞)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다.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繕工鑑監役),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에, 12월,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 侍直)에 임명되었다.
46세(1776) 3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임명되었다.
47세(1777) 7월에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49세(1779) 12월에 영천군수(榮川郡守)에 임명되었다.
53세(1783) 5월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10월 23일에 중풍으로 사망했다. 12월, 청주 구미평(龜尾坪)에 장사 지냈고 박지원이 묘지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