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 관념론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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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08/04/21
Pages/Weight/Size 153*224*30mm
ISBN 9788956440996
Categories 인문 > 철학/사상
Description
독일관념론의 중심이며 낭만주의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끼친 셸링의 사상이 담긴 책이다. 본래 피히테의 영향을 받았으나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완전히 다른 객관적 관념론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셸링 철학의 대표작이다.

이 책에 담긴 셸링 철학의 핵심은‘자연과 정신의 종합’으로 여기서 그는 인간이 자연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자연에게서 인간이 나온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책은 독일관념론의 완성자라 불리는 그의 사상에 대해 이해의 계기를 제공하고 '초월철학'이나 '관념론'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Contents
서문
도입문

1부 초월적 관념론의 원리
2부 초월적 관념론의 일반 연역
3부 초월적 관념론의 근본문장들에 따른 이론철학체계
4부 초월적 관념론의 근본문장들에 따른 실천철학체계
5부 초월적 관념론의 근본문장들에 따른 목적론의 주요문장들
6부 철학의 일반적 기관에 대한 연역, 혹은 초월적 관념론의 근본문장들에 따른 예술철학의 주요문장들

주석
옮긴이의 말
어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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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프리드리히 셸링,전대호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레온베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튀빙겐대학교에 입학해 헤겔과 횔덜린을 사귀었다. 17세 때 원죄에 관한 내용으로 학위논문을 썼으며, 1793년부터 지속적으로 철학 논문들을 발표해 독일 철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초기 글에서는 피히테의 영향이 많이 보이지만, 1797년에 발표한 ≪자연철학에 대한 이념≫부터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세계를 펼쳐 나가기 시작한다. 1798년 괴테의 추천으로 예나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된다. 셸링은 그곳에서 괴테, 실러, 슐레겔 등 독일 낭만파 작가들과 사귀었으며, A. W. 슐레겔의 아내인 카롤리네 슐레겔을 만났다. 그녀는 1803년에 이혼하고 셸링과 결혼했다.

1802년과 1803년에 셸링은 헤겔과 함께 ≪철학 비판지(Kritisches Journal der Philosophie)≫를 제작했다. 헤겔은 그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그를 친구이자 스승처럼 생각했고, 헤겔의 첫 번째 저술도 ≪피히테의 철학 체계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1801)다. 그러나 튀빙겐대학교에서부터 맺어 온 셸링과 헤겔의 우정은 헤겔이 ≪정신현상학≫(1807)을 발표한 뒤 깨진다. 셸링은 1803년 뷔르츠부르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1806년에는 뮌헨으로 가서 바이에른 학술원 회원과 미술대학 사무총장을 지내게 된다. 에를랑겐대학교에서도 강의했으며, 1827년에는 뮌헨대학교 교수직을 맡고 미술대학 학장도 지내게 된다. 184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베를린대학교로 셸링을 초빙했으며, 그는 그곳에서 1846년까지 교수직을 수행했다. 베를린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 중에는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키르케고르, 엥겔스, 부르크하르트, 바쿠닌도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자연철학에 대한 이념≫(1797), ≪자연철학의 체계에 대한 첫 번째 기획≫(1799),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1800), ≪대학 수업 방법에 관한 강의≫(1803),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1809), 사후 출간된 ≪예술철학≫(1859), ≪신화 철학≫(1856), ≪계시 철학≫(1861) 등이 있다.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레온베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튀빙겐대학교에 입학해 헤겔과 횔덜린을 사귀었다. 17세 때 원죄에 관한 내용으로 학위논문을 썼으며, 1793년부터 지속적으로 철학 논문들을 발표해 독일 철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초기 글에서는 피히테의 영향이 많이 보이지만, 1797년에 발표한 ≪자연철학에 대한 이념≫부터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세계를 펼쳐 나가기 시작한다. 1798년 괴테의 추천으로 예나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된다. 셸링은 그곳에서 괴테, 실러, 슐레겔 등 독일 낭만파 작가들과 사귀었으며, A. W. 슐레겔의 아내인 카롤리네 슐레겔을 만났다. 그녀는 1803년에 이혼하고 셸링과 결혼했다.

1802년과 1803년에 셸링은 헤겔과 함께 ≪철학 비판지(Kritisches Journal der Philosophie)≫를 제작했다. 헤겔은 그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그를 친구이자 스승처럼 생각했고, 헤겔의 첫 번째 저술도 ≪피히테의 철학 체계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1801)다. 그러나 튀빙겐대학교에서부터 맺어 온 셸링과 헤겔의 우정은 헤겔이 ≪정신현상학≫(1807)을 발표한 뒤 깨진다. 셸링은 1803년 뷔르츠부르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1806년에는 뮌헨으로 가서 바이에른 학술원 회원과 미술대학 사무총장을 지내게 된다. 에를랑겐대학교에서도 강의했으며, 1827년에는 뮌헨대학교 교수직을 맡고 미술대학 학장도 지내게 된다. 184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베를린대학교로 셸링을 초빙했으며, 그는 그곳에서 1846년까지 교수직을 수행했다. 베를린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 중에는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키르케고르, 엥겔스, 부르크하르트, 바쿠닌도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자연철학에 대한 이념≫(1797), ≪자연철학의 체계에 대한 첫 번째 기획≫(1799),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1800), ≪대학 수업 방법에 관한 강의≫(1803),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1809), 사후 출간된 ≪예술철학≫(1859), ≪신화 철학≫(1856), ≪계시 철학≫(186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