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서의 이미지’로부터 ‘잔존하는 이미지’까지. 현대의 사유와 삶을 관통하는 이미지의 역사로 보는 새로운 철학의 모험
이미지란 무엇인가. 이미지 정치, 이미지 메이킹, 이미지 관리 등의 말들은 진짜에 덧붙여진 가짜를 이미지라고 가정한다. 우리는 진짜 실재와 가짜 이미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 서로 닮아 있는 것들을 줄 세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거기에서 진짜를 찾아내는 것이 고전주의의 재현적 사고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지가 실재를 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가 이미지를 닮는다. 전자 미디어 시대는 이런 허구인지 상상인지 실재인지 모를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수많은 이미지로 우리 삶은 얽혀 있다.
미세하게 차이 나는 이미지들이 한데 묶여 유사성의 정도에 따라 줄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미지들은 모두 다르다. ‘우리’의 얼굴도 모두 다르다. 한국인의 얼굴, 영남 사람의 얼굴, 대구 사람의 얼굴, 가족의 얼굴이 다르며, 거울 속의 내 얼굴조차도 날마다 다르다. 우리는 매 순간 달라진다. 그것은 매번 새롭게 출현하는 이미지이다. 동일성에 근거를 두는 재현적 사고는 이젠 너무 낡아 버렸다.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이미지를 가짜나 모방, 판타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그 자체로 다르게 사유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동일한 것이 아니라 차이들, 모방들, 원본과 닮지도 않았다고 무시된 것들, 시뮬라크르들을 사유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수많은 이미지로 얽혀 있는 세상에서 만나는 단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서도 우리는 새롭게 출현한다. 근원적 떨림을 만들어 내고,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잡담 속에 추락하는 삶을 붙잡아 주는 그런 이미지는 어떻게 생성될 수 있을까? 그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예술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닌 기억이, 이미지가 상기하는 기억이 나를 찌르고 흔드는 때가 있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찍은 희미하고 흔들린 사진 앞에서, 뒤집힌 세월호의 이미지 앞에서 거기 없었던 우리가 흔들린다. 어쩌면 그 이미지들은 불쑥 현재가 되어 있는 과거이며, 언젠가는 내 아이가, 내 가족이, 내가 그 이미지 속에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미래의 불안일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와 뒤집혀진 배는 다시 여러 이미지로 바뀌어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파리의 뒷골목에서, 올랜도의 나이트클럽에서, 터키의 해안가에서, 강남의 건물 화장실에서 이미지들은 불현듯 출몰한다. 그 이미지는 빛의 흔적이고, 사라진 것의 흔적이며, 과거와 미래의 흔적일 수도 있다. 언젠가 그 흔적은 프루스트에게 마들렌 과자가 그랬던 것처럼 흔적 이상의 기억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 앞에서 내 것이 아닌 기억은 왜 나를 흔드는 걸까?
이 책은 이런 여러 질문과 관련된 사유를 이미지 개념의 철학사적 논의를 통해 모색한다. 이미지와 관련된 여러 개념의 언어적 기원 탐색에서 시작된 논의는 베르그손, 사르트르, 바슐라르, 뒤랑, 바르부르크, 들뢰즈를 거쳐 디디-위베르만과 아감벤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개념의 철학사적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미지 개념에 대한 현대적 사유의 맥락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Contents
머리말
01 이미지 개념의 계보
‘이미지’란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미지는 만드는 것인가 모방하는 것인가?
02베르그손, 그 자체로서의 이미지
표상과 사물 사이
두 가지 이미지 체계와 신체 이미지
지각과 정념의 차이
이미지와 기억
03 사르트르, 상상하는 의식으로서의 이미지·
사르트르의 베르그손 비판
이미지의 네 가지 특징
심적 이미지, 물질적 이미지, 아날로공
2부 라캉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
04뒤랑, 상징체계로서의 이미지
사르트르의 이미지 개념에 대한 뒤랑의 비판
상징 분류의 범주들
상상력의 상징체계 연구를 위한 인류학적 방법론
상징체계 범주와 상상력 기능의 보편성
05 바르부르크, 고대의 잔존과 집단적 기억의 징후로서의 이미지
이름 없는 학문 영역의 선구자
고대 그리스 미술 모방론과 표현의 매체적 차이
고대의 잔존과 징후
06 이미지, 상상력, 기억
이미지와 상상력
상상, 가능성, 실재성, 잠재성
베르그손에 대한 뒤랑의 오해 혹은 상상력에 대한 과도한 사랑
07 영화, 지속의 동적 단면으로서의 이미지
언어로서의 영화와 운동-이미지로서의 영화
운동-이미지의 세 가지 양상
운동-이미지의 분류와 다양한 파생 기호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
3부 클라인 정신분석
08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으로서의 이미지
과거와 현재와 만나는 지점
잔존하는 이미지와 시대착오
이미지가 주는 충격과 흔들림의 근거들
사후성과 몸짓
몸짓성의 출현과 정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