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끝없는 장소 묘사,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프루스트의 심리론,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쿤데라의 형이상학적 성찰, 줄거리를 압도하는 트리스트럼 섄디의 장황한 잡담들... 이 과도한 여담에 눈살을 찌푸리고 지루한 단락을 건너뛴다고 해서 찔릴 이유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2천여 년 동안 수사학과 문학 이론은 '여담' 현상을 작품의 통일성을 방해하는 요소라며 가차없이 단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텍스트의 자기반영성 및 다성성에 주목하는 현대 비평이 여담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이야기 속에서 여담은 샛길로 빠지고 담장을 넘으며 그러다 들키면 다시 폼을 잡고 뻔한 설교를 늘어놓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비정통적이고 기상천외하다. 작가가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라고 반문할 정도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여담은 결코 미숙한 글쓰기의 흔적이 아니다. 여담은 텍스트의 타자로서 서술에 이질성과 무질서를 도입하고 수다와 엉뚱함으로 서술의 엄격한 구성과 경제성을 조롱하며 파편성과 불연속성의 화신이 되어 직선적인 줄거리를 파괴하는 일종의 반 수사학을 구축한다. 또 여담은 글과 말, 텍스트와 곁텍스트,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교란하면서 미메시스의 폐쇄성이라는 엄숙주의에 도전한다.
수사학-시학-비평과 여담의 대결을 소피스트의 정신과 후기 구조주의의 언어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이 책은 언어란 본질적으로 잡다한 것이며 진정한 한계를 실험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유희, 조롱, 역설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책 표지 중에서
Contents
옮긴이 서문 : 여담 - 문학의 노마드
서론 : 방향 잃은 메모들
1장 고대 수사학 : 체계 속의 과잉
기원과 안개
아레오파고스 재판소의 정리
아리스토텔레스의 강경한 태도
로마 수사학의 경우 1 :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
로마 수사학의 경우 2 : 천의 구석을 가진 별장
간주곡 1 이소크라테스의 <<판아테나이>>
2장 고전주의적 엄격성의 경계들
물 흐르듯 매끄러운 담화의 흐름 : 이음매의 위세
프로테우스 같은 여담, 또는 화불단행
항구성과 가변성 사이에서
여담의 최소 규모
간주곡 2 잊혀진 한 방법에 대하여 : 크립스 혹은 신중의 방법
3장 여담의 구실이 되는 수사학과 비평
뛰는 수사학자 위에 나는 수사학자 있다
소설 속 인물이 문학 이론에 참견할 때…
간주곡 3 "깡충깡충 뛰는 시적 걸음걸이…"
4장 직선의 소란
직선을 통한 우회
지연되는 시작
논지의 망각, 상기, 교란
휴지, 중단, 재개
끝없는 끝
간주곡 4 살롱으로의 소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