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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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1/11/22
Pages/Weight/Size 140*210*33mm
ISBN 9788954683609
Categories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Description
땅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애착과 잔혹한 욕망
모럴을 해체하는 노골적이고 야수적인 서사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에밀 졸라의 문제작


자연주의 문학의 거장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총서 제15작 『대지』(1887)가 국내 최초로 번역되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대지』는 발자크의 『농민』과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농촌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땅을 부의 형태로 인식하기 시작한 농부들이 집요한 소유욕으로 난폭한 살인자로 변해가는 모습과 함께,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다시 돌아가는 양육자 땅, 관대하고 평화로운 위대한 어머니 땅에 대한 사랑을 그린” 대작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환경으로서의 땅, 그 피지배자 인간의 유기적인 삶을 반목가적 관점에서 그린 『대지』는 발표 직후 반도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이후 작가가 생물학자의 시선으로 자연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자연의 순환리듬에 따라 살아가는 자연적 존재인 농부들을 관찰하면서도 고유의 상상력으로 인간 삶의 조건을 진실하게 성찰한 작품으로 재평가되었고, 프랑스 북부 탄광촌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총서 제13작 『제르미날』과 쌍을 이루는 걸작으로 널리 사랑받게 되었다.

『대지』는 농촌 사람들의 성격과 욕망, 관습, 삶의 조건과 실제 생활, 농부와 도시 노동자의 상충되는 이해관계나 농산물 무역정책 등의 광범위한 사회적 문제에 섬세한 자연 묘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것들의 모태인 땅에 대한 신앙을 지닌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역동적인 소설이다. 농촌 르포르타주와도 같은 이 힘찬 소설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농민들의 욕망과 야심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에게 가하는 가혹한 노동으로 흘리는 그들의 땀이다. 풍요로운 은혜의 기쁨을 주는 동시에, 일군 열매를 한순간에 앗아가는 슬픔을 주는 땅, 욕망과 열정을 빨아들이는 악녀처럼 변덕스러운 땅에 영혼을 사로잡힌 농부들은 아무리 작은 땅뙈기라도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한번 손에 넣은 이상 조금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다구니를 쓴다. 영혼을 깎는 듯한 가혹한 노동 끝에 손에 넣은 땅은 그들에게 생명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땅은 이러한 인간의 애달프고 처절한 구애와 집착에 무관심하고, 모든 생명을 틔워내면서도 그 생명의 피와 땀과 뼈를 삼키며 더 젊고 비옥해진다.

소설이 파종 장면에서 시작해 파종 장면으로 끝나고, 푸앙 영감의 시신이 담긴 관이 씨앗에 비유되는 것처럼, 『대지』의 이야기는 자연의 질서가 삶과 죽음의 순환이듯, 죽음 또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한 것이라는 삶과 죽음의 영원한 순환 신화를 그려내면서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대지』는 생생한 성과 탐욕의 숨결이 가득한 소설이지만, 원대한 구상과 단단한 주제의식으로 끝까지 옹골차게 달려가는 빼어난 농촌문학이자 소설가 졸라의 매력이 응축된 걸작이다.
Contents
제1부 ……… 7
제2부 ……… 113
제3부 ……… 245
제4부 ……… 359
제5부 ……… 505

해설 | 『대지』, 잔혹한 인간 욕망의 신화 ……… 655
에밀 졸라 연보 ……… 669
Author
에밀 졸라,조성애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이탈리아 출신인 아버지와 프랑스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1840년 4월 2일 파리에서 태어나 1862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청소년 시절을 프랑스의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보낸다. 그곳의 중학교에서 만난 세잔과는 남부의 산과 들판을 같이 쏘다니며 목가적 시를 암송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가꾼다. 1847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파리로 올라와서 궁핍한 시절을 겪지만, 대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접하면서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키워나간다. 토목기사였던 아버지가 1847년 사망하자 홀어머니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간다. 대학교 입학 자격시험에 실패하고 나서 1862년부터 아셰트 출판사에서 일하며 여러 작가를 접한다. 1866년 아셰트 출판사를 사직하고 본격적인 글쓰기에 들어간다. 특히 아셰트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진보적 사상가들과 문학계와 교류하게 되고, 신문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기질을 통해 본 자연의 한 측면」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 밝힌다.

아셰트사를 떠나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한 졸라는 여러 신문에 논평을 기고하는데, 특히 당시 마네와 조만간 인상주의자로 불릴 화가들을 옹호하면서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학파에 대항하는 젊은 논객으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졸라는 제2제정을 비판하는 공화파 신문들을 통해 점점 더 과격한 기사들을 발표하면서, 이 체제를 철저히 비판하는 『루공가의 운명』을 기점으로 『루 공 마카르 총서』의 연작을 시작한다. 20권으로 구성된 대하소설 ‘루공 마카르 총서’(1871~1893) 중 『목로주점』(1877)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경제적인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파리 근교 ‘메당’에 별장을 샀는데 그곳은 자연주의 소설가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거기서 모임(메당의 저녁)을 가지면서 졸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자연주의 소설의 선두주자가 된다. 그의 소설과 논평들은 언제나 많은 스캔들을 동반하지만 다행히도 제2제정이 몰락하면서 법적인 제재를 모면하게 된다. 이후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파(위스망스, 모파상, 세아르 등)의 지도자로 인지되고, 1880년 이들과 함께 작업한 『메당의 야화』는 일종의 자연주의 선언서가 된다.

낭만주의 문학을 존중했지만 감정과 사실을 구별하며 당시 사회적 정치적 면모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사실주의 작가들을 칭찬하며 급기야 ‘자연주의 문학’의 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킨다. 문학비평사에서 당시 작가들에게 금기시되던 요소인 돈, 섹스를 건드렸다고 평가된다. 첫 장편소설 『테레즈 라캥』(1867)이 출간부터 적나라한 묘사로 심한 비판을 듣자 소설 앞부분에 따로 서문을 보태기도 한다.

그러나 평론계의 격렬한 반발을 몰고 온 『대지』 이후 자연주의 문학가들의 해체적 글쓰기에 대립하는 새로운 저항의 글쓰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주의 시대는 끝을 향해 간다. 『파스칼 박사』를 끝으로 총 스무 권의 『루공 마카르 총서』 연작이 완성된다. 이 총서의 완성 후 졸라는 자신의 시대의 심각한 문제들을 다룬 새로운 소설 연작을 시작한다. 『루르드』와 『로마』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실패를 다뤘으며, 『파리』(는 과학에 대한 신념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인 원리들로 인한 장밋빛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파리』를 막 완성한 직후 1898년 1월 ‘나는 고발한다!’라는 장문의 글을 신문에 실어 당시 한창 시끄러웠던 드레퓌스 사건에 목소리를 싣는다. 군대, 정치, 법의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드레퓌스가 희생되었다는 입장을 펼쳐서 모독죄로 1년 구형을 받게 돼 영국에서 1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한다. 문학가로서 최고의 명예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던 시점에서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것은 그의 모든 명예를 실추시킬 위험이 있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드레퓌스 사건의 소송 재개를 위해 싸운다. 1899년 드레퓌스 사건은 재심에 회부되고 졸라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이 사건 동안 졸라는 조레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노동의 재구성과 부의 분배에 대한 푸리에의 순수한 무정부주의에 더 이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1888년부터 입문한 ‘사진’에 빠져서 현상까지 직접 했는데, 자화상 및 가족 친지들의 일상생활을 사진으로 남기고 1900년 프랑스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르포 형식의 사진을 많이 찍는다. 치밀한 자료 수집을 기반으로 집필 작업을 한 졸라의 성향과 부합되는 취미다.

『4복음서』는 새로운 혁명적 사회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다. 『풍요』, 『노동』, 『진실』이 출판되었으며, 후속 작품으로 『정의』가 쓰일 예정이었으나 1902년 9월 29일 막힌 굴뚝으로 인한 가스 중독으로 사망함으로써 그의 마지막 작품 『정의』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사고에 연루된 의문이 풀리지 않아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살해되었다는 추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 1908년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팡테옹으로 이장되어 현재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와 같은 공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이탈리아 출신인 아버지와 프랑스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1840년 4월 2일 파리에서 태어나 1862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청소년 시절을 프랑스의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보낸다. 그곳의 중학교에서 만난 세잔과는 남부의 산과 들판을 같이 쏘다니며 목가적 시를 암송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가꾼다. 1847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파리로 올라와서 궁핍한 시절을 겪지만, 대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접하면서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키워나간다. 토목기사였던 아버지가 1847년 사망하자 홀어머니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간다. 대학교 입학 자격시험에 실패하고 나서 1862년부터 아셰트 출판사에서 일하며 여러 작가를 접한다. 1866년 아셰트 출판사를 사직하고 본격적인 글쓰기에 들어간다. 특히 아셰트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진보적 사상가들과 문학계와 교류하게 되고, 신문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기질을 통해 본 자연의 한 측면」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 밝힌다.

아셰트사를 떠나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한 졸라는 여러 신문에 논평을 기고하는데, 특히 당시 마네와 조만간 인상주의자로 불릴 화가들을 옹호하면서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학파에 대항하는 젊은 논객으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졸라는 제2제정을 비판하는 공화파 신문들을 통해 점점 더 과격한 기사들을 발표하면서, 이 체제를 철저히 비판하는 『루공가의 운명』을 기점으로 『루 공 마카르 총서』의 연작을 시작한다. 20권으로 구성된 대하소설 ‘루공 마카르 총서’(1871~1893) 중 『목로주점』(1877)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경제적인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파리 근교 ‘메당’에 별장을 샀는데 그곳은 자연주의 소설가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거기서 모임(메당의 저녁)을 가지면서 졸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자연주의 소설의 선두주자가 된다. 그의 소설과 논평들은 언제나 많은 스캔들을 동반하지만 다행히도 제2제정이 몰락하면서 법적인 제재를 모면하게 된다. 이후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파(위스망스, 모파상, 세아르 등)의 지도자로 인지되고, 1880년 이들과 함께 작업한 『메당의 야화』는 일종의 자연주의 선언서가 된다.

낭만주의 문학을 존중했지만 감정과 사실을 구별하며 당시 사회적 정치적 면모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사실주의 작가들을 칭찬하며 급기야 ‘자연주의 문학’의 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킨다. 문학비평사에서 당시 작가들에게 금기시되던 요소인 돈, 섹스를 건드렸다고 평가된다. 첫 장편소설 『테레즈 라캥』(1867)이 출간부터 적나라한 묘사로 심한 비판을 듣자 소설 앞부분에 따로 서문을 보태기도 한다.

그러나 평론계의 격렬한 반발을 몰고 온 『대지』 이후 자연주의 문학가들의 해체적 글쓰기에 대립하는 새로운 저항의 글쓰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주의 시대는 끝을 향해 간다. 『파스칼 박사』를 끝으로 총 스무 권의 『루공 마카르 총서』 연작이 완성된다. 이 총서의 완성 후 졸라는 자신의 시대의 심각한 문제들을 다룬 새로운 소설 연작을 시작한다. 『루르드』와 『로마』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실패를 다뤘으며, 『파리』(는 과학에 대한 신념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인 원리들로 인한 장밋빛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파리』를 막 완성한 직후 1898년 1월 ‘나는 고발한다!’라는 장문의 글을 신문에 실어 당시 한창 시끄러웠던 드레퓌스 사건에 목소리를 싣는다. 군대, 정치, 법의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드레퓌스가 희생되었다는 입장을 펼쳐서 모독죄로 1년 구형을 받게 돼 영국에서 1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한다. 문학가로서 최고의 명예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던 시점에서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것은 그의 모든 명예를 실추시킬 위험이 있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드레퓌스 사건의 소송 재개를 위해 싸운다. 1899년 드레퓌스 사건은 재심에 회부되고 졸라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이 사건 동안 졸라는 조레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노동의 재구성과 부의 분배에 대한 푸리에의 순수한 무정부주의에 더 이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1888년부터 입문한 ‘사진’에 빠져서 현상까지 직접 했는데, 자화상 및 가족 친지들의 일상생활을 사진으로 남기고 1900년 프랑스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르포 형식의 사진을 많이 찍는다. 치밀한 자료 수집을 기반으로 집필 작업을 한 졸라의 성향과 부합되는 취미다.

『4복음서』는 새로운 혁명적 사회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다. 『풍요』, 『노동』, 『진실』이 출판되었으며, 후속 작품으로 『정의』가 쓰일 예정이었으나 1902년 9월 29일 막힌 굴뚝으로 인한 가스 중독으로 사망함으로써 그의 마지막 작품 『정의』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사고에 연루된 의문이 풀리지 않아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살해되었다는 추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 1908년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팡테옹으로 이장되어 현재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와 같은 공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