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논어 중 가장 급진적인 우리말 번역,
그러면서도 원문의 참뜻을 고스란히 담아낸 술술 읽히는 논어
논어가 실생활 현대 한국어로 완벽히 재탄생했다. 조선왕조실록 재번역 작업에 참여하는 소장 여성 한학자 임자헌씨가 종래의 고답적인 ‘원문-현토’ 방식이나 ‘고문체(古文體)’ 방식을 과감히 탈피한 혁신적인 한글 번역을 『군자를 버린 논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고 의미가 모호한 추상적인 옛 용어들을 모두 현대적인 용어나 일상어로 옮기고, 문체 면에서도 불필요한 엄숙주의를 걷어낸 경쾌한 구어체를 사용했다. 공자의 캐릭터도 형식보다는 본질을 중시했던 공자의 본모습에 맞게 친근하고 소탈하게 살렸다. 번역의 결과는 놀랍다. 대화의 정황이나 맥락이 생생히 드러나 별도의 해설이 없어도 될 만큼 잘 읽히면서 논어 원문이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은 뜻대로 고스란히 살아난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군자를 버린 논어』에는 논어의 상징과도 같은 단어 ‘군자(君子)’가 등장하지 않는다. ‘군자’뿐만이 아니다. ‘사(士)’ ‘소인(小人)’ ‘예악(禮樂)’ ‘인(仁)’ 등 관습적으로 논어 번역에 사용되어온 많은 고색창연한 단어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 단어들은 맥락에 따라서 ‘진정한 지성인/리더’ ‘지식인’ ‘좀생이’ ‘문화 예술’ ‘진정한 사람다움’ 등으로 옮겨진다. 문장 속에 워낙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떤 단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의식되지 않을 정도다.
그동안 논어를 살아 있는 현대의 언어로 번역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나온 번역본도 많지만 이들 구태의연한 용어의 장벽만은 쉽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 때문에 독자는 한글로 번역된 논어를 읽으면서도 마치 외국어를 해독할 때와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혹시 당신이 한때 논어를 읽기로 마음먹었다가 몇 줄 읽지 못하고 내려놓았다면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Contents
〈머리말〉
이 논어는 왜 군자를 버렸는가?
1 학이(學而)
자, 학문의 길을 열어봅시다!
2 위정(爲政)
효란 무엇인가요?
3 팔일(八佾)
질서가 무너진 사회
4 이인(里仁)
사람이 걸어야 할 길
5 공야장(公冶長)
제자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1
6 옹야(雍也)
제자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2
7 술이(述而)
배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가르쳐줍니다
8 태백(泰伯)
훌륭한 옛적 임금들
9 자한(子罕)
마음가짐이 위대함을 만듭니다
10 향당(鄕黨)
생활 속에서 공자는
11 선진(先進)
공자와 안연, 그 애틋한 사제간
12 안연(顔淵)
온전한 사람다움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13 자로(子路)
때로는 귀여운 상남자
14 헌문(憲問)
이름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15 위령공(衛靈公)
진정한 지성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16 계씨(季氏)
숫자로 배워보는 유학
17 양화(陽貨)
기회가 필요했던 공자의 갈등
18 미자(微子)
은둔파 현자들과의 만남
19 자장(子張)
제자들에게 배워보는 시간
20 요왈(堯曰)
정치를 말하며, 이상 수업 끝!
〈부록〉
간단히 살펴보는 논어의 시공간
간추린 공자의 생애와 사상
논어 속에서 만나는 공자의 제자들
인명 찾아보기
Author
공자,임자헌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아버지 숙양홀(叔梁紇)과 어머니 안씨(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 둘레가 언덕처럼 솟아 있어 이름을 구(丘: 언 덕 구)라고 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씨(季氏) 가문의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48살 때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497년 이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기원전 479년 73살 때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언덕)에 묻혔다.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아버지 숙양홀(叔梁紇)과 어머니 안씨(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 둘레가 언덕처럼 솟아 있어 이름을 구(丘: 언 덕 구)라고 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씨(季氏) 가문의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48살 때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497년 이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기원전 479년 73살 때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언덕)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