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라블레의 『가르강튀아』는 세계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16세기 르네상스 초기의 이 작품에 대해 플로베르는 “우리의 인생이 신비에 차 있듯이, 신비에 가득 찬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극찬했으며, 빅토르 위고는 라블레를 “인간 정신의 심연”이라고 말했고 발자크는 “피타고라스, 히포크라테스, 단테를 요약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격찬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저명한 문학 연구가인 바흐친이라는 사람은 라블레의 작품이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소설의 기원이라고까지 평가한다. 근대 서구 문명의 전환점인 르네상스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라블레의 가르강튀아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
읽지 않는 고전은 없는 고전이고, 즐기지 못하고 감동을 주지 못하는 고전은 죽은 고전이다. ‘큰글자 세계문학컬렉션’은 마음을 풍요롭게 다스리고 날카롭게 자신을 마주하고 싶은 시니어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최초의 고전문학선이다. 두껍고 지루한 고전을 친절하고 더 맛깔스럽게 재탄생시킨 ‘축역본’이자 글자 크기를 키워, 보다 편한 독서를 도와준다.
Contents
독자에게
작가 서문
제1장 가르강튀아의 계보와 탄생에 대하여
제2장 가르강튀아라는 이름과 어린 시절에 대하여
제3장 가르강튀아의 놀라운 지적 능력과 교육에 대하여: 파리로 유학 가는 가르강튀아
제4장 우리의 가르강튀아는 파리에서 제일 먼저 무슨 일을 했는가?
제5장 가르강튀아, 공부를 시작하다
제6장 레르네의 과자 장수들과 가르강튀아의 백성들 간 다툼으로 전쟁이 일어나다
제7장 사태를 평화롭게 수습하기 위해 그랑구지에는 어떤 노력을 했는가
제8장 가르강튀아, 파리를 떠나 아버지에게 가다
제9장 가르강튀아, 우리의 수도사 장을 만나다
제10장 드디어 본격 전쟁이 시작되다: 첫 번째 승리
제11장 전쟁에 승리하여 적에게 관용을 베풀고 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주다
제12장 가르강튀아, 장 수도사를 위해 텔렘 수도원을 짓다
『가르강튀아』를 찾아서
『가르강튀아』 바칼로레아
Author
프랑수아 라블레,진형준
프랑스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꼽히는 작가. 서프랑스 쉬농 근처 라드니비에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변호사인 앙투안 라블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10년경 프란체스코수도회 소속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교단이어서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에 맞지 않았고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에도 미흡했다. 지식욕이 강했던 라블레는 법률과 신학을 공부한 다음 의학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직을 떠나 몽펠리에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의사로 활동하면서 의학에 관한 고전 번역서를 여러 권 출간했다.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은 1532년 리옹에서 『팡타그뤼엘』을 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 『팡타그뤼엘 대연대기』에 착안해서 이 작품을 썼다. 첫 작품이 대성공을 거두자 1534년에 『가르강튀아』를 발표했다. 팡타그뤼엘이 가르강튀아의 아들이므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작품을 쓴 셈이다. 이어서 1546년 『제3서』,1552년 『제4서』까지 『가르강튀아』 연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가 죽은 뒤인 1562년 『제5서』가 출간되지만 진짜 그의 작품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제4서』를 제외하고 모두 이단이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금서 처분을 받는다. 그는 1553년 4월 파리의 자르댕 거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꼽히는 작가. 서프랑스 쉬농 근처 라드니비에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변호사인 앙투안 라블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10년경 프란체스코수도회 소속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교단이어서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에 맞지 않았고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에도 미흡했다. 지식욕이 강했던 라블레는 법률과 신학을 공부한 다음 의학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직을 떠나 몽펠리에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의사로 활동하면서 의학에 관한 고전 번역서를 여러 권 출간했다.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은 1532년 리옹에서 『팡타그뤼엘』을 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 『팡타그뤼엘 대연대기』에 착안해서 이 작품을 썼다. 첫 작품이 대성공을 거두자 1534년에 『가르강튀아』를 발표했다. 팡타그뤼엘이 가르강튀아의 아들이므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작품을 쓴 셈이다. 이어서 1546년 『제3서』,1552년 『제4서』까지 『가르강튀아』 연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가 죽은 뒤인 1562년 『제5서』가 출간되지만 진짜 그의 작품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제4서』를 제외하고 모두 이단이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금서 처분을 받는다. 그는 1553년 4월 파리의 자르댕 거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