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비범죄화로 이어질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사회가 여성을 결정과 선택의 주체로 공인한 사례이다. 하지만 『임신중지』의 저자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에 ‘선택’이라는 수사가 따라붙고 여성이 ‘주체’의 자리에 앉은 듯 보일 때부터 ‘백래시’는 더 교묘하고 견고해진다고 말한다. 임신중지 관련법이 바뀌더라도 임신중지와 관련된 상식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유해하고 끔찍하며 도덕성을 의심받을 일이라고 믿는다. ‘임신중지’가 입에 오르는 어디서나, ‘절박한, 끔찍한, 비극적인, 불행한, 후회되는, 소름 끼치는’ 같은 수사가 따라붙는다. ‘범죄’라는 누명을 벗고 ‘살인’과 나란히 놓이던 처지에서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임신중지라는 ‘선택’을 늘 ‘차악’이나 ‘필요악’으로만 받아들인다. 임신중지는 처벌할 대상이 아니라고, 임신중지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경험이 긍정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고려해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임신중지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운동사를 연구하며 우리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임신중지에 관한 생각과 이미지가 친임신중지와 반임신중지 운동의 부침 속에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임을 발견한다. 『임신중지』에서 에리카 밀러는 1960년대 촉발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임신중지 운동사를 탐색하며 ‘사회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아서,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을 ‘모성적 행복’, ‘애통함’, ‘수치’, ‘공포’라는 특정한 감정으로 점철시키는 획일적인 임신중지 서사를 조명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계급, 인종, 장애에 대한 차별, 젠더권력과 성차별적 정치 역학을 파헤친다.
『임신중지』는 총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활발했던 임신중지 운동의 역사를 밝히며, 이 과정에서 ‘선택’이라는 수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규명한다. 2장에서는 소위 ‘진보적’인 임신중지 관련법 제정과 개정의 과정에서 ‘모성’이라는 거대한 각본이 작동한 정치 공학을 들여다본다. 3장에서는 1980년대 중반 반임신중지 운동에서 펼친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표현된 ‘태아’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규범적 효과를 발휘했는지를 살펴본다. 4장과 5장에서는 여성이 임신중지를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여기도록 만든 과정을 밝히고, 인종, 계급, 젠더에 따라 국가와 사회가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임신을 계급화해 온 정치의 전모를 밝힌다.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 속에서 평면적으로만 이해됐던 임신중지는 사실상 가족, 섹슈얼리티, 여성의 지위 등 여러 사회, 정치적 의미와 공명해 온 입체적인 문제다. 이 책은 임신중지를 둘러싼 감정의 정치를 해체하고, 이를 통해 임신중지라는 사안을 제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다.
Contents
들어가며: 감정적인 선택 7
1장 선택의 정치 51
2장 행복한 선택 87
3장 선택의 애통함 129
4장 수치스러운 선택 173
5장 국가의 선택 205
맺음말: 모성 바깥의 삶 239
감사의 말 259
옮긴의 말 263
미주 265
참고 문헌 315
찾아보기 343
Author
에리카 밀러,이민경
역사학·사회학·문화정치학을 가로지르며 재생산에 관한 학제 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재생산 문제가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구 통제에 어떻게 문화적으로 재현되며, 인종·계급·젠더와 관련된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 내는지 폭넓게 연구했다. 아울러 재생산의 생명정치와 재생산 가능한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고 규범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가 ‘국가 건설’이라는 큰 계획과 어떻게 맞물리는지에 관심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대학에서 젠더연구·사회학·역사학을 가르쳤고, 현재 애들레이드 대학교에서 젠더학과 사회학을 강의한다.
역사학·사회학·문화정치학을 가로지르며 재생산에 관한 학제 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재생산 문제가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구 통제에 어떻게 문화적으로 재현되며, 인종·계급·젠더와 관련된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 내는지 폭넓게 연구했다. 아울러 재생산의 생명정치와 재생산 가능한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고 규범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가 ‘국가 건설’이라는 큰 계획과 어떻게 맞물리는지에 관심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대학에서 젠더연구·사회학·역사학을 가르쳤고, 현재 애들레이드 대학교에서 젠더학과 사회학을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