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그의 저서를 통해 ‘인(仁)·의(義)·덕(德)’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인’의 논의를 경제적인 논의로 전개시킨 것이 곧 『목민심서』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의 첫머리에서, “다른 관직은 하겠다고 나서도 좋으나 목민의 관직만은 구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했다. 이렇듯 첫머리에서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 다산은 이 책 전체에서 목민관의 행동, 곧 정책집행 담당자로서 지녀야 할 윤리를 강조했다. 다산은 관료로서 국정에 참여할 때부터 이러한 정신문제에 대해서 퍽 고심했으며, 그의 문학작품 속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조선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목민심서』의 바탕에는 학정을 일삼는 목민관을 응징하며 일하는 백성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다산의 애민사상과, 나라의 부강을 염원하고 외래 침략자를 반대하는 애국사상이 흐르고 있다. 결국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행정원리는 지방관의 자리에 서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편에 서서 관리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2편 해관(解官) 6조
1. 벼슬의 교체〔遞代〕
2. 돌아갈 때의 행장〔歸裝〕
3. 수령의 유임(留任)을 청함〔願留〕
4. 수령이 지은 죄의 용서를 빎〔乞宥〕
5. 수령의 죽음을 슬퍼함〔隱卒〕
6.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사모함〔遺愛〕
다산 정약용 생애 저작 사상
다산 정약용 연보
Author
정약용,최박광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36년 별세하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백여 권의 책을 썼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36년 별세하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백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