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록 언행록 성학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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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08/07/07
Pages/Weight/Size 160*230*35mm
ISBN 9788949704821
Categories 인문 > 한국철학
Description
「자성록」

「자성록」은 퇴계가 자신의 사상적 원숙기라고 할 수 있는 55∼60세 때까지의 시기에 문인들에게 보낸 서간 가운데서 수양과 성찰에 도움이 되는 편지 22통을 모아 직접 편집한 책이다. 「자성록」 한 권만 연구해도 그 속에서 참으로 많은 철학적 사상과 학문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거기에는 성학을 배우는 초학자들의 공통된 병을 고치는 처방, 학문하는 기본자세, 거경궁리의 방법,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는 데 대한 준엄한 경계 등이 있으며, 이러한 내용들은 학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가장 친절하고 신뢰할 만한 안내자가 된다. 또한 엄격하고도 부단한, 퇴계의 학문하는 정신과 고매한 인품, 깊은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퇴계 언행록」

퇴계는 그 언어와 행실에서 지극히 겸손하고 발라서 무릇 세인의 모범이 되었다. 그의 매화향처럼 깨끗하고 고결한 품격을 책으로 썼으니 그것이 바로 「퇴계 언행록」이다.

「성학십도」

「성학십도」는 퇴계 유학 사상의 진수를 빠짐없이 드러낸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퇴계는 68세 때, 일생동안 쌓아올린 학문적 지식을 쏟아 마지막 봉공(奉公)의 정성을 다하여 임금께 「진성학십도차」를 올린다. 그런 만큼 「성학십도」는 퇴계의 가장 원숙한 말년의 사상의 전모가 일목요연하게 압축 요약되어 있는 것이요, 그의 심혈을 경주한 대표적인 명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은퇴한 퇴계가 국가에 바친 만년 충절의 일단이기도 하다.
Contents
자성록(自省錄)

진리 얻으매 깊이 음미해야
남시보(南時甫)에게 1
도리는 오로지 일상생활에서
남시보에게 2
예를 행함에 공손함을 다해야
정자중(鄭子中)에게 1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
정자중에게 2
이(理)는 만물 속에 있으므로
정자중에게 3
거울같이 맑고 물같이 고요하고
정자중에게 답함 4
기(氣)에는 삶과 죽음 있지만 이(理)에는 삶과 죽음이 없다
정자중에게 5
다만 경(敬)을 지켜 마음을 함부로 잃지 말며
정자중에게 6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어주지 아니하니
정자중에게 7
자기에게는 이롭게 남에게는 해롭게, 이것이 순과 도척의 구분되는 사유
정자중에게 8
어진 이는 산을 즐기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즐기고
권호문(權好文)에게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데에 있다
김돈서에게
이해가 눈앞에 있더라도 속박되지 않으면
이숙헌(李叔獻) 율곡(栗谷)에게
높은 곳을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황중거(黃仲擧)에게 답하여 《백록동규집해》를 논함
천하만물은 오로지 한 가지 이치만으로 되어
황중거에게 거듭 답함
마음의 영묘함을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놓고
기정자 명언(奇正字 明彦)에게
곤륜이 대추를 통째로 삼킨다
기명언에게
하늘의 뜻이 그리 시키는 것
정자중과 기명언이 학문을 논함에 답함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되는 것
기명언에게 주는 편지의 별지
얕으면 얕게, 깊으면 깊게 말해야
노이재(盧伊齋)에게
오래 사는 것 개의치 않고 덕을 닦아 죽음을 기다린다
기명언에게

언행록(言行錄)

언행록1 학문·공경·덕성을 말하다
묻고 배움
독서
격물치지를 논함
마음의 보존과 성찰
경(敬) 공부를 논함
덕을 이룸
사람을 가르침

언행록2 자질 절도 몸가짐을 말함
학문의 강론과 변별
자질과 품성
처소와 침묵의 절제
몸을 다스림
청빈한 생활
검약(儉約)
조상을 받드는 일
가훈(家訓)
시골생활
사양함과 받아들이기

언행록3 벼슬살이와 향리생활을 말함
사람들과의 사귐
음식과 의복의 절제
자연을 즐김
벼슬살이와 물러나기
임금을 섬김
임금께 삼가기를 아룀
나의 벼슬살이 자식들의 벼슬살이
자식들에게 벼슬살이를 가르침

언행록4 이(理)와 기(氣) 예(禮)를 말함
이(理)와 기(氣)를 논하다
관혼상제의 예를 논함
시사(時事)를 논함

언행록5 바른 학문, 바른 인생을 말함
인물을 논평하다
과거의 폐단을 논평함
바른 학문을 숭상함
그 밖의 여러 기록
경연 신하들이 아뢴 말씀
임종의 기록

언행록6 경(敬)·의(義)·지(知)·행(行)이 하나로 관통했던 일생
사실들을 기록함―김성일(金誠一)
언행을 모두 적음―정유일(鄭惟一)
세상에 남기신 일들―이이(李珥)
행장을 가려 적음―박순(朴淳)
사후 추존(追尊)을 위한 건의
교지문(敎旨文)
제문(祭文)

성학십도(聖學十圖)

성학십도
성학십도를 올리는 글
《성학십도》 원문 해설
1. 태극도설(太極圖說)
2. 서명(西銘)
3. 소학제사(小學題辭)
4. 대학경(大學經)
5. 동규후서(洞規後敍)
6.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
7. 인설(仁說)
8. 심학도설(心學圖說)
9. 경재잠(敬齋箴)
10.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논사단칠정서(論四端七情書)
1. 기명언에게 드림―기미(己未)
2. 사단칠정을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없다는 기명언의 변증을 첨부함
3. 기명언에게 답함―사단칠정을 논한 두 번째 글
4. 기명언에게 답함―사단 칠정을 논하는 세 번째 글
5. 기명언에게 답함
6. 기명언에게 거듭 답함
7. 기명언의 ‘사단 칠정 후설’을 덧붙임
8. 기명언의 ‘사단 칠정 총론’을 덧붙임

시(詩)
1. 길선생 마을을 지나며
2. 월영대(月影臺)
3. 촉석루(矗石樓)
4. 영남루(嶺南樓)
5. 봄에
6. 복사꽃 아래에서
7. 봄날 냇가에
8. 압록강 천연해수
9. 위화도(威化島)
10. 청평산(淸平山)을 지나며
11. 도산 달밤의 매화
12. 망호당의 매화를 찾아
13. 도수매(倒垂梅)
14. 호당(湖堂)의 매화 늦봄에 피어나다
15. 고산(孤山)
16. 퇴계 초가에서 황금계(黃錦溪) 찾아옴을 기뻐하며
17. 초가를 계서(溪西)로 옮기고 한서암(寒棲庵)이라 이름짓다
18. 이선생이 한서암에 오시다
19. 퇴계
20. 한서(寒棲)
21. 가재
22. 맑은 연꽃 향기
23. 배 안에서
24. 도연명의 음주에 화창함
25. 이포(梨浦)를 지나며
26. 어부
27. 반궁(泮宮)
28. 서당에서 김응림(金應霖) 추회(秋懷)에 합창함
29. 소나무를 읊는다
30. 모춘우작(暮春偶作)
31. 세모에 고향 편지 받아들고 감회를
32. 저물녘 거닐며
33. 눈 속의 대나무

소(疏)
한낮의 태백성은 병란의 징조(甲辰乞勿絶倭使疏)
무엇을 의(義)라 하겠습니까(戊午辭職疏)
천도(天道)는 가까이에 있다(戊辰六條疏)

경연일기(經筵日記)
건괘상구강의(乾卦上九講義)
서명고증강의(西銘考證講義)

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
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
이황 연보
Author
이황,고산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