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요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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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5/11/06
Pages/Weight/Size 136*201*20mm
ISBN 9788937427213
Categories 인문 > 한국철학
Description
김원중 교수의 번역으로 만나는

시작하는 모든 이를 위한

영원한 고전




조선 중기 뛰어난 경세가이자 참교육을 실천한 위대한 스승 율곡 이이가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학문하는 자세와 방법에 대해 쓴 『격몽요결』이 김원중 교수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격몽요결』은 ‘요결’이라는 제목답게 짧은 분량 안에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더불어 동양학의 기초를 집약해 담고 있는 책이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 그 마음을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아무리 못난 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선한 본성을 되찾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려는 초학도뿐 아니라 이미 학문을 다져 온 사람들도 초심으로 돌아가 뜻을 다시금 바로 세우고 마음을 가다듬어 보라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다. 430여 년 전의 가르침임에도 여전히 초학자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명저다.



이번 번역은 동양 고전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언어로 섬세히 복원하는 작업에 매진해 온 김원중 교수가 『삼국유사』에 이어 10여 년 만에 다시 시도한 우리 고전 번역이다. 각 장의 처음과 끝에 해설을 붙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으며 본문의 주석에는 『논어』, 『명심보감』, 『대학』 등의 관련 구절을 인용하여 더한층 풍부하게 『격몽요결』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실어 원전의 결도 함께 느낄 수 있다.







Contents
옮긴이 서문
해제

서문(序)
학문이 없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해설

1장 뜻을 세우다(立志章 第一)
스스로 기약하라
누구나 성인의 자질을 타고나는 법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뜻을 세우면 즉시 공부하라
해설

2장 낡은 습관을 개혁하라(革舊習章 第二)
낡은 습관이 학문을 막는다
버려야 할 여덟 가지 낡은 습관
칼날로 뿌리를 자르듯 낡은 습관을 버려라
해설

3장 몸가짐(持身章 第三)
충성과 믿음으로 하라
신중함과 부지런함
구용과 구사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
학문은 일상생활 가운데 있으니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라
자기를 이겨 내라
말과 생각을 줄여라
본받아야 할 대상
모든 잡기를 경계하고 도를 향해 나가라
공경스럽게 마음속을 곧게 하라
학문은 결국 자신을 위함이다
불의를 경계하라
거경과 궁리, 그리고 역행
사무사와 무불경
평생 동안 하라
해설

4장 책을 읽다(讀書章 第四)
책을 읽는 것이 먼저다
책을 대하는 자세
『소학』 읽기
『대학』 읽기
『논어』 읽기
『맹자』 읽기
『중용』 읽기
『시경』 읽기
『예경』 읽기
『서경』 읽기
『역경』 읽기
『춘추』 읽기
그 밖의 독서 목록
섭렵하지 말라
해설

5장 어버이를 섬기다(事親章 第五)
부모님이시여
승낙이 먼저다
어버이를 섬기는 하루 일과
부모의 입맛에 맞춰라
사랑보다 공경이 먼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언하라
부모의 병을 마음 깊이 근심하라
잠시라도 부모를 잊지 말라
삼공의 자리와도 바꿀 수 없는 것
해설

6장 장사 제도(喪制章 第六)
모르면 물어라
초혼
어머니의 상주는 남편인 아버지다
부모상일 경우
염하지 않았을 때부터 발인까지
조문법
상복을 입고 있어야
억지로 예를 따르려 한다면
신주를 집에 모시는 법
곡하는 숫자는 정해져 있지 않다
어버이의 상에는 마음을 다해야
지나치게 슬퍼하다 병나는 것도 불효다
특별한 경우의 상례
심상의 경우
신위는 초하루에
대공 이상의 복을 입을 초상
해설

7장 제사 의례(祭禮章 第七)
제사의 원칙
사당 제사를 주관하는 자
사당이 먼저다
제때 맞는 음식
제사에 앞서 요구되는 원칙들
제사란 형편에 따라야
묘제와 기제
제사는 꼭 지내야
예법에 맞아야
해설

8장 집 안에서의 생활(居家章 第八)
가정을 이끌어 가는 것
관례와 혼례
형제는 한 몸
부부는 늘 화락한 모습을
자녀 교육법
비복들을 대하는 법
남녀지간에 분별이 있어야 하는 법
군자는 도를 걱정할 뿐
하지 못할 일과 하고 싶지 않은 바
수령의 선물은 받지 말라
해설

9장 사람을 대하는 법(接人章 第九)
겸손하고도 온화하게
친구를 고르는 법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
유유상종하는 법
온화하고 공손함이 덕의 바탕
허물이 있으면 고쳐라
가까운 데서 변화시켜야
이로움을 버려라
의롭지 못한 청탁
해설

10장 세상에 처하는 법(處世章 第十)
벼슬보다는 학문이 먼저다
과거 시험 때문에 학문을 못하는가
벼슬은 배부름을 구하지 않아야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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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율곡 이이,김원중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