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현실이 이론보다 더 엄정하다]는 저자 이순예가 우리나라에 아도르노를 제대로 알리고자 쓴 책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며 비판이론을 고안하고 벤야민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등 현대철학에 남긴 아도르노의 족적은 매우 크고 그만큼 유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국내에서 아도르노 사상의 오독이 빈번했음을 밝힌다. 특히 ‘대중문화’에 관한 부분에 많은 오류가 있었다. 아도르노가 예술론에 입각해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저자는 아도르노의 사상을 차근차근 설명해 가면서 그가 말한 대중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낸다.
아도르노는 우선 ‘자율예술’과 ‘가벼운 예술’을 비교한다. 자율예술은 예술 고유의 내적 가치에만 충실한 순수한 예술이다. 이런 자율예술을 자본주의가 변용한 것이 가벼운 예술이다. 가령 에로티시즘을 자율예술의 형태로 소화한 것이 로댕의 [키스·라면 가벼운 예술의 형태로 변용한 것은 걸그룹의 섹시댄스다. 대부분의 아도르노 논의는 여기서 멈춘다. 가벼운 예술, 즉 ‘대중문화’의 기만성을 비판하거나, ‘대중문화’가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그것을 폐기하자고 주장한 아도르노의 극단성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 두 비판은 모두 틀렸다. 아도르노는 오히려 ‘대중문화’의 역할을 인정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까지 하다. 진짜 문제는 대중문화가 테크놀로지, 즉 문화산업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판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되는데 아도르노는 계몽을 변증법적으로 분석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즉 타자화를 특성으로 하는 계몽이 결국은 인간조차 타자화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제 생각하지 못한다. 테크놀로지에 지배당한 인간, ‘트랜스휴먼’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과거에는 산업화가 파시즘의 조건이 되었지만 최근에는 테크놀로지가 파시즘의 조건이 되었다. 과학기술이 존재의 조건을 결정짓는 요즘, [아도르노]는 테크놀로지와 파시즘적 자본주의의 우울한 유착을 냉정하게 파악하도록 도울 것이다.
Contents
왜 우리는 오늘 아도르노를 읽는가
고향에 돌아온 망명객, '죽음에 이르는 이론'을 입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