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욱 박사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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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1/09/23
Pages/Weight/Size 152*215*35mm
ISBN 9788934979852
Categories 종교 > 불교
Description
[백성욱 박사 전집 4]
백성욱 박사가 직접 쓴
논문·시·에세이·편지·법문 등 글 모음집


한국인 최초 독일 철학박사 백성욱. 그의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 박사학위 논문인 〈불교순전철학〉을 포함하여, 《불교》 《동광》 《여시》 《조선농민》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한 40여 편의 주옥같은 글을 모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시기의 견문과 사유, 독일 유학 시기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잃지 않았던 기개, 귀국 후 금강산 수도에 들어가기 전 문사로서 그리고 불교학인으로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모습과 소회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만년에 후학을 지도하면서 남긴 법문도 만나볼 수 있다.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조국 광복의 염원과 불교 대중화, 사회 재건에 대한 한결같은 그의 모습은 우리 시대 큰 어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 책은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학론문집》(동국대학교, 1959)을 토대로, 누락된 부분(〈불교순전철학〉)을 온전히 되살리고 새로 발굴한 16편의 글을 추가한 것이다. 백성욱 박사 특유의 문체를 최대한 살리면서 현대에 잘 쓰이지 않는 어휘 중 대체 가능한 것은 현대어로 수정하였으며, 대체하기 어려운 용어는 주석이나 괄호 안에 보충 설명을 추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또한 각 글의 출처와 소장처를 밝힘으로써 원문을 찾아볼 수 있게 하였고, 백성욱 박사의 간략 연보를 추가하여 글이 쓰인 시점의 백성욱 박사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Contents
1. 논설(論說)

불교순전철학
1. 서분(序分)
역사적 개념과 불교순전철학 | 관념 | 논리
2. 정종분(正宗分)
붓다 | 다르마
사키아무니와 그 후계자
부자연스러운 사회 |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노력 | 싯다르타의 탄생 | 싯다르타의 출가 | 싯다르타의 수행 | 싯다르타의 깨달음 | 샤키아무니의 고통과 그를 향한 결집 | 구세주가 된 샤키아무니와 그의 최후 | 두 가지 우주창조설 | 샤키아무니의 우주관 | 인류가 방황하는 이유 | 천상천하 유아독존 | 샤키아무니의 여성관 | 샤키아무니의 윤리관 | 샤키아무니의 법률관 | 샤키아무니의 교육관 | 세계로 나간 불교 | 대승불교의 탄생 | 대승불교의 완성 | 나오며
샤키아무니
두 가지 우주창조설 | 샤키아무니의 우주관 | 신우주관을 요구하였던 인도 사회 | 싯다르타의 탄생과 출가 | 싯다르타의 난관과 깨달음 | 불교의 전파
유사 이래로 철학상에 문제되는 지사(智砂)와 조금술(造金術)은 금일에야 해결할 수 있을까
개관 | 조금술의 역사 | 조금술의 현재
대입소(大入小)의 일리(一里): 일모단(一毛端)에 현보왕찰(現寶王刹)
‘대입소의 일리’의 출현 | 반도의 ‘대입소의 일리’ | 지구, 달, 태양 | 태양계, 은하계, 은하군 | 분자와 원자 | 원자의 조직 방식과 운동 | 분자의 운동 | 공기 | 전기장과 자기장 | ‘일모단 현보왕찰 미진리 전대법륜’의 의미 | 법률생활 | 경제생활 | 정신생활 | 가정의 성립 | 미적 취미 | 정신과 육체가 조화되어 행하는 사랑
대우(大宇)와 인류의 생(生)적 준칙
‘나’란 무엇일까
시작하며 | 나는 나를 위해 사는가 | 무가치한 생활 | 한인의 자아실현 방식 | 서구인의 자아실현 방식 | 주신족의 자아실현 방식 | 마치며
‘나’에 대한 고찰
3독심 | 9상차제 | 5종계 | 6도윤회 | 절대 능력의 실현
자아의 인식으로 자아의 독립에
인류란 무엇인가
나의 신앙과 느낌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근래 불교운동에 대하여
세계로 나아간 불교의 도정 | 서양의 불교운동 | 동양의 불교운동 | 조선의 불교운동
역경(譯經)의 필요성
현대적 불교를 건설하려면
현황 | 도승 | 교육 | 포교 | 비구니 | 학사원 | 제적 | 시험 | 경제
우리의 건설에 대하여
현재 네팔에는 무엇이 있나
곤륜산 절정에는 무엇이 있나
아미타 화신인 타시 라마
유럽인의 안목에 나타난 인도인의 동물숭배와 반도불교
정계에 몸을 던진 인도의 여류 시인

2 수상(隨想)

평수잡조(萍水雜俎)
1. 느낌
2. 낙조(落照)
3. 추천귀안(秋天歸雁)
4. 명월(明月)의 유영(留影)
5. 자연의 경(景)
6. 인중자연(人中自然)의 발로(發露)
7. 나의 느낌
8. 프랑스공원에서의 하루
9. 맹서(盟誓)
10. 빼앗기 어려워라
11. 우어(寓語)
12. 기다림
13. 내 살림
14. 뜻 맞은 사랑
15. 파상주(波上舟)
16. 오늘 나의 느낌
17. 비 맞은 꽃
18. 여름의 느낌
19. 내가 본 상하이 현황과 느낌
20. 미(美)의 차별
21. 생(生)의 위협자
22. 내 동무
23. 미(美)
24. 어느 날 공원에서
25. 쫓긴 주인
26. 가난을 중심으로 한 내외면
27. 어느 날 길가에서
28. 아우 찾는 소녀
29. 어떻게 보아야 미(美)를 잘 보나
30. 사람이 보는 미(美)는 우주의 공통이 아님
31. 나는 임의 살림
10년 후에 다시 자연경을 찾아서
남순(南巡)하였던 이야기
다시 적멸궁을 찾아가면서
오만보살찬앙회가 발기함을 듣고
베를린 불교원 방문기
동지에게
학인연맹의 기대
만일 내가 다시 20살의 청년이 될 수 있다 하면
과거 몇십 년간의 준비기: 앞으로의 불교
앞으로의 조선, 희망의 횃불
각계각인 신년에 하고 싶은 말
축 ‘불교’의 종연생(從緣生)
‘나’를 발견하는 길

3 서간(書簡)

백성욱의 서신 몇 절1
백성욱의 서신 몇 절2

4 설법(說法)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쳐라
《금강경》 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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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욱 박사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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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백성욱
1897년 8월 19일(음력) 종로구 연건동에서 출생했다. 만 3세에 아버지를 여읜 데 이어, 9세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정릉 봉국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 13세에 최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전국 주요 사찰의 불교전문강원에서 8년에 걸쳐 공부하다, 1917년(20세)에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한용운 스님의 명을 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을 인솔하여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했으며, 이후 남대문과 대한문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대대적인 검문과 체포가 시작되자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운동을 했으며,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했다.
1921년, 24세에 충정공 민영환의 아들 범식·장식 형제의 지원을 받아 그들과 함께 1년 동안 프랑스 북부 보베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공부했다. 이듬해,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던 이미륵을 만나 철학과 한스 마이어 교수를 소개받았다. 시험에 통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3년 가을부터 마이어 교수를 지도교수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박사학위 논문 작성에 매진했고, 이듬해 5월에 초고 완성, 9월에 인준받았다.
1925년 9월, 28세에 귀국하여 신문과 잡지에 시와 논문, 에세이 등을 기고하고, 각종 토론회와 법회에 나서는 등 불교 혁신운동에 참여하다, 1929년(32세) 늦여름, 불교전수학교(구 불교중앙학림) 교수직 등 모든 걸 내려놓고 금강산에 입산, 장안사 보덕암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수행 중 혜정 손석재 선생의 권유로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 함께 가서 100일 기도 정진했으며, 1930년부터 장안사 안양암에서 1일 1식 하며 ‘대방광불화엄경’ 염송 수행을 시작했다. 안양암 3년 정진 중 얻은 바가 있어, 장안사 지장암에서 손혜정 선생과 함께 근대 최초의 수행공동체 운동을 전개하며 회중수도會衆修道를 시작했다. 조국 독립을 기도하고, ‘대방광불화엄경’을 염송하면서 7년여 동안 500여 명의 제자를 지도했다. 1938년(41세) 4월, 지장암 수도 중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경남 의령경찰서로 연행, 50여 일간 취조받다가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하산하게 되었다.
이후 서울 돈암동과 치악산 상원사 동굴에서 정진 수도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를 조직하고 민중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인연이 있던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했으며, 1950년(53세) 제4대 내무부장관,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3년 7월, 부산 피난 중 동국대학교 제2대 총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동국대학교에서 물러나게 된 1961년 7월까지 중구 필동에 대학교 교사를 건립하고 시설·학사·교수 등 다방면에 걸쳐 동국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금강삼매경론》 《화엄경》 ‘인류 문화사’ 등을 강의했으며, 《고려대장경》 영인 작업에 착수, 총 48권의 현대식 영인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1962년, 65세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의 야트막한 산을 개간, ‘백성목장白性牧場’을 경영하면서 《금강경》을 쉽게 강의하고, 인연 있는 후학을 지도했다. 1981년 8월 19일(음력), 출생일과 같은 날, 8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후학들이 금강경독송회, 청우불교원 금강경독송회, 바른법연구원, 백성욱 박사 교육문화재단, 백성욱연구원, 여시관如是觀 등을 세워 가르침을 잇고 있다.
1897년 8월 19일(음력) 종로구 연건동에서 출생했다. 만 3세에 아버지를 여읜 데 이어, 9세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정릉 봉국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 13세에 최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전국 주요 사찰의 불교전문강원에서 8년에 걸쳐 공부하다, 1917년(20세)에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한용운 스님의 명을 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을 인솔하여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했으며, 이후 남대문과 대한문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대대적인 검문과 체포가 시작되자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운동을 했으며,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했다.
1921년, 24세에 충정공 민영환의 아들 범식·장식 형제의 지원을 받아 그들과 함께 1년 동안 프랑스 북부 보베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공부했다. 이듬해,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던 이미륵을 만나 철학과 한스 마이어 교수를 소개받았다. 시험에 통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3년 가을부터 마이어 교수를 지도교수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박사학위 논문 작성에 매진했고, 이듬해 5월에 초고 완성, 9월에 인준받았다.
1925년 9월, 28세에 귀국하여 신문과 잡지에 시와 논문, 에세이 등을 기고하고, 각종 토론회와 법회에 나서는 등 불교 혁신운동에 참여하다, 1929년(32세) 늦여름, 불교전수학교(구 불교중앙학림) 교수직 등 모든 걸 내려놓고 금강산에 입산, 장안사 보덕암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수행 중 혜정 손석재 선생의 권유로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 함께 가서 100일 기도 정진했으며, 1930년부터 장안사 안양암에서 1일 1식 하며 ‘대방광불화엄경’ 염송 수행을 시작했다. 안양암 3년 정진 중 얻은 바가 있어, 장안사 지장암에서 손혜정 선생과 함께 근대 최초의 수행공동체 운동을 전개하며 회중수도會衆修道를 시작했다. 조국 독립을 기도하고, ‘대방광불화엄경’을 염송하면서 7년여 동안 500여 명의 제자를 지도했다. 1938년(41세) 4월, 지장암 수도 중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경남 의령경찰서로 연행, 50여 일간 취조받다가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하산하게 되었다.
이후 서울 돈암동과 치악산 상원사 동굴에서 정진 수도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를 조직하고 민중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인연이 있던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했으며, 1950년(53세) 제4대 내무부장관,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3년 7월, 부산 피난 중 동국대학교 제2대 총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동국대학교에서 물러나게 된 1961년 7월까지 중구 필동에 대학교 교사를 건립하고 시설·학사·교수 등 다방면에 걸쳐 동국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금강삼매경론》 《화엄경》 ‘인류 문화사’ 등을 강의했으며, 《고려대장경》 영인 작업에 착수, 총 48권의 현대식 영인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1962년, 65세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의 야트막한 산을 개간, ‘백성목장白性牧場’을 경영하면서 《금강경》을 쉽게 강의하고, 인연 있는 후학을 지도했다. 1981년 8월 19일(음력), 출생일과 같은 날, 8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후학들이 금강경독송회, 청우불교원 금강경독송회, 바른법연구원, 백성욱 박사 교육문화재단, 백성욱연구원, 여시관如是觀 등을 세워 가르침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