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욱 박사의 금강경 강화

$21.85
SKU
9788934979821
+ Wish
[Free shipping over $100]

Standard Shipping estimated by Mon 12/9 - Fri 12/13 (주문일로부 10-14 영업일)

Express Shipping estimated by Wed 12/4 - Fri 12/6 (주문일로부 7-9 영업일)

* 안내되는 배송 완료 예상일은 유통사/배송사의 상황에 따라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Publication Date 2021/09/23
Pages/Weight/Size 152*215*30mm
ISBN 9788934979821
Categories 종교 > 불교
Description
[백성욱 박사 전집 1]
“마음을 닦아서, 그 마음을 밝게 하여 다시 컴컴해지지 않는 법”
독창적인 시각과 해석이 돋보이는 백성욱 박사의 《금강경》 해설서


불교의 기원과 의미, 부처님의 일생부터 시작하여 한국 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입체적으로 해설한 백성욱 박사의 독창적인 금강경 강화講話를 한 권에 담았다.

“오직 네 마음이 밝아야 하겠다. 너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다 아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가린 것이다. 오직 모든 것이 실상이 없는 줄 알 때, 네 마음이 밝을 것이다.”

3,000년 전 부처님이 솔직하고 간단하게 말씀하신 바를, ‘시대의 활불活佛’이라 불렸던 선지식 백성욱 박사가 일반 대중을 위해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 1959년 백성욱 박사의 동국대학교 강의를 바탕으로, 문도들의 사가에서 설한 추가 강의까지 정리하여 함께 실었다. 난해하고 현학적인 경전 해석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밝히고 그 마음을 바르게 쓰는 법, 즉 ‘《금강경》을 실행하는 법’에 온전히 초점을 맞추고,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들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일상의 실천을 권면한다.

가장 널리 유통되는 구마라집의 봉조역奉詔譯에 백성욱 박사가 현토懸吐를 달고 정리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저본으로 육성 강의의 현장 느낌을 충실히 살리되, 필요한 부분에는 풍부한 설명을 추가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Contents
들어가는 말- 부처님과 금강경에 대하여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제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제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제9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제12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제13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제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제20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제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제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제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제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금강경 추가 강의 1
금강경 추가 강의 2

백성욱 박사 연보
찾아보기
Author
백성욱,김강유,이광옥,김원수
1897년 8월 19일(음력) 종로구 연건동에서 출생했다. 만 3세에 아버지를 여읜 데 이어, 9세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정릉 봉국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 13세에 최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전국 주요 사찰의 불교전문강원에서 8년에 걸쳐 공부하다, 1917년(20세)에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한용운 스님의 명을 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을 인솔하여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했으며, 이후 남대문과 대한문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대대적인 검문과 체포가 시작되자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운동을 했으며,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했다.
1921년, 24세에 충정공 민영환의 아들 범식·장식 형제의 지원을 받아 그들과 함께 1년 동안 프랑스 북부 보베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공부했다. 이듬해,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던 이미륵을 만나 철학과 한스 마이어 교수를 소개받았다. 시험에 통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3년 가을부터 마이어 교수를 지도교수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박사학위 논문 작성에 매진했고, 이듬해 5월에 초고 완성, 9월에 인준받았다.
1925년 9월, 28세에 귀국하여 신문과 잡지에 시와 논문, 에세이 등을 기고하고, 각종 토론회와 법회에 나서는 등 불교 혁신운동에 참여하다, 1929년(32세) 늦여름, 불교전수학교(구 불교중앙학림) 교수직 등 모든 걸 내려놓고 금강산에 입산, 장안사 보덕암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수행 중 혜정 손석재 선생의 권유로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 함께 가서 100일 기도 정진했으며, 1930년부터 장안사 안양암에서 1일 1식 하며 ‘대방광불화엄경’ 염송 수행을 시작했다. 안양암 3년 정진 중 얻은 바가 있어, 장안사 지장암에서 손혜정 선생과 함께 근대 최초의 수행공동체 운동을 전개하며 회중수도會衆修道를 시작했다. 조국 독립을 기도하고, ‘대방광불화엄경’을 염송하면서 7년여 동안 500여 명의 제자를 지도했다. 1938년(41세) 4월, 지장암 수도 중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경남 의령경찰서로 연행, 50여 일간 취조받다가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하산하게 되었다.
이후 서울 돈암동과 치악산 상원사 동굴에서 정진 수도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를 조직하고 민중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인연이 있던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했으며, 1950년(53세) 제4대 내무부장관,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3년 7월, 부산 피난 중 동국대학교 제2대 총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동국대학교에서 물러나게 된 1961년 7월까지 중구 필동에 대학교 교사를 건립하고 시설·학사·교수 등 다방면에 걸쳐 동국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금강삼매경론》 《화엄경》 ‘인류 문화사’ 등을 강의했으며, 《고려대장경》 영인 작업에 착수, 총 48권의 현대식 영인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1962년, 65세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의 야트막한 산을 개간, ‘백성목장白性牧場’을 경영하면서 《금강경》을 쉽게 강의하고, 인연 있는 후학을 지도했다. 1981년 8월 19일(음력), 출생일과 같은 날, 8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후학들이 금강경독송회, 청우불교원 금강경독송회, 바른법연구원, 백성욱 박사 교육문화재단, 백성욱연구원, 여시관如是觀 등을 세워 가르침을 잇고 있다.
1897년 8월 19일(음력) 종로구 연건동에서 출생했다. 만 3세에 아버지를 여읜 데 이어, 9세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정릉 봉국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 13세에 최하옹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전국 주요 사찰의 불교전문강원에서 8년에 걸쳐 공부하다, 1917년(20세)에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한용운 스님의 명을 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을 인솔하여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했으며, 이후 남대문과 대한문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대대적인 검문과 체포가 시작되자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운동을 했으며,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했다.
1921년, 24세에 충정공 민영환의 아들 범식·장식 형제의 지원을 받아 그들과 함께 1년 동안 프랑스 북부 보베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공부했다. 이듬해,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의대에서 공부하던 이미륵을 만나 철학과 한스 마이어 교수를 소개받았다. 시험에 통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3년 가을부터 마이어 교수를 지도교수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박사학위 논문 작성에 매진했고, 이듬해 5월에 초고 완성, 9월에 인준받았다.
1925년 9월, 28세에 귀국하여 신문과 잡지에 시와 논문, 에세이 등을 기고하고, 각종 토론회와 법회에 나서는 등 불교 혁신운동에 참여하다, 1929년(32세) 늦여름, 불교전수학교(구 불교중앙학림) 교수직 등 모든 걸 내려놓고 금강산에 입산, 장안사 보덕암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수행 중 혜정 손석재 선생의 권유로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 함께 가서 100일 기도 정진했으며, 1930년부터 장안사 안양암에서 1일 1식 하며 ‘대방광불화엄경’ 염송 수행을 시작했다. 안양암 3년 정진 중 얻은 바가 있어, 장안사 지장암에서 손혜정 선생과 함께 근대 최초의 수행공동체 운동을 전개하며 회중수도會衆修道를 시작했다. 조국 독립을 기도하고, ‘대방광불화엄경’을 염송하면서 7년여 동안 500여 명의 제자를 지도했다. 1938년(41세) 4월, 지장암 수도 중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경남 의령경찰서로 연행, 50여 일간 취조받다가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하산하게 되었다.
이후 서울 돈암동과 치악산 상원사 동굴에서 정진 수도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를 조직하고 민중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인연이 있던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했으며, 1950년(53세) 제4대 내무부장관,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3년 7월, 부산 피난 중 동국대학교 제2대 총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동국대학교에서 물러나게 된 1961년 7월까지 중구 필동에 대학교 교사를 건립하고 시설·학사·교수 등 다방면에 걸쳐 동국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금강삼매경론》 《화엄경》 ‘인류 문화사’ 등을 강의했으며, 《고려대장경》 영인 작업에 착수, 총 48권의 현대식 영인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1962년, 65세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의 야트막한 산을 개간, ‘백성목장白性牧場’을 경영하면서 《금강경》을 쉽게 강의하고, 인연 있는 후학을 지도했다. 1981년 8월 19일(음력), 출생일과 같은 날, 8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후학들이 금강경독송회, 청우불교원 금강경독송회, 바른법연구원, 백성욱 박사 교육문화재단, 백성욱연구원, 여시관如是觀 등을 세워 가르침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