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르그레즈와 학장신부에게 보낸 19통의 편지 모음집이다. 6통의 편지는 부제로서 조선 입국을 위한 노력과 심정을, 김대건 신부와 순교자들 이야기를 라틴어로 옮기게 된 정황을 담고 있다. 나머지 편지는 사제가 된 후 조선에 입국한 정황과 조선에서의 사목활동, 신자들의 생활, 사목자의 내밀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울러 새로 발견된 두 통의 편지와 한국천주교회의 간략한 역사와 당시 사용된 교회 용어 해설도 수록되어 있다.
Contents
역자의 말
1부 한국천주교회의 간략한 역사 한국천주교회의 간략한 역사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생애
최양업 신부 서한 일람표
2부 간절한 소원
첫 번째 편지 하느님과 홀로 있기가 소원입니다 49
두 번째 편지 저의 간절한 소원을 채워주십시오 52
세 번째 편지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굳세어져 56
네 번째 편지 눈물의 골짜기에서 또 다시 59
다섯 번째 편지 고군산섬에 남아있고 싶어서 63
여섯 번째 편지 두 번째 해로 원정 69
3부 우리 가련한 포교지
일곱 번째 편지 6개월 동안 5개 도를 81
여덟 번째 편지 수많은 순교의 꽃들 119
열 번째 편지 우리 가련한 포교지 163
열한 번째 편지 부모님의 순교 행적에 대해 168
열두 번째 편지 순교자 최해성 요한 176
4부 마지막 하직 인사
열세 번째 편지 주님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191
열네 번째 편지 백성을 내리누르는 조선의 사회구조 208
열다섯 번째 편지 우리 둘은 단짝입니다 217
열여섯 번째 편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사도 232
열일곱 번째 편지 우리 순교자들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235
열여덟 번째 편지 아직도 사슬에 묶여있는 것 248
열아홉 번째 편지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253
미주
부록 ; 새로 발견된 2통의 편지
Author
최양업,정진석
1821년 3월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6년 2월 6일 15세의 최양업은 모방 신부로부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44년 12월,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고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1849년 12월 압록강을 넘어 13년 만에 귀국하여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서의 성무를 시작했다. 최양업 신부는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여 ㎞를 걸어야 했다. 1861년 6월 15일, 과로와 장티푸스로 경북 문경 인근에서 11년 6개월을 사목하고 만 40세에 선종했다. 유해는 배론성지에 안장되었다.
1847년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1859년 한국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겼다.
1821년 3월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6년 2월 6일 15세의 최양업은 모방 신부로부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44년 12월,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고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1849년 12월 압록강을 넘어 13년 만에 귀국하여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서의 성무를 시작했다. 최양업 신부는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여 ㎞를 걸어야 했다. 1861년 6월 15일, 과로와 장티푸스로 경북 문경 인근에서 11년 6개월을 사목하고 만 40세에 선종했다. 유해는 배론성지에 안장되었다.
1847년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1859년 한국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