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어머니와 네 아들 신부의 추억과 사랑이 담긴 편지와 일기. 이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과 뜨거운 모정, 신앙의 힘까지 얻을 수 있다. 한 가정에서 어머니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성소의 못자리가 바로 그 가정임을 깨닫고, 어머니의 사랑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음을 잊지 않게 해준다. 한국 교회사상 최초로 네 명의 아들을 신부로 봉헌한 이춘선 마리아. 열악하고 힘겨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자식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길러낸 한 신앙인이자 엄마의 모습이 일기와 편지글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Contents
추천사
들어가며
1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겠습니다 일기 1983~2012
이춘선 마리아가 들려주는 유년 시절 이야기
| 묵주기도가 나에게 준 은총 |
남의 험담을 한다는 것/ 마음 아픈 일/ 칼(KAL) 기가 추락했다/ 나도 모르게 신을 벗었다
오세민 루도비코 신부님이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
|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마지막 은총 |
삶에서 고통이 없다면/ 나도 완전히 썩어보자/ 100원이 주기 싫어서 등
이춘선 마리아의 기도시
| 내 영은 고요히 |
비천한 모든 일/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위대한 선물/ 젬마의 첫 서원식/
이 몸이 늙어 세상 떠나거든/ 우리 집 뜨락/ 성모님 생신날 등
2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편지 1963~2014
구두쇠라는 인상은 남기지 말도록/ 계를 모아 내 소유로 한 이유/ 천주님의 청춘 용사들/
어쩐지 허전한 가슴/ 엄마의 마음이란 조물주가 박아주신 걸까 등
오세민 루도비코 신부님이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
| 어머니 무릎 베고 들은 성인전 이야기 |
무혼 권리/ 아니면 깨끗이 물러나길/ 너의 편지에 감동되었다/ 꿈에 세 번이나 보여서/
잘해주지 못한 것은 내 허물이라/ 즐거운 일만 계속된다면 천국이겠지요/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등
이춘선 마리아의 기도시
| 골고타의 언덕길 |
엄마의 마음은 더 굳어졌습니다/ 제대에 조용히 꿇은 사제의 모습/
말띠 신부가 말처럼 달려야겠군요/ 영영 술을 끊으면 얼마나 좋을까 등
오세민 루도비코 신부님이 들려주는 어머니 이야기
| 원래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
이춘선 마리아의 생애/ 이춘선 마리아의 자녀들
Author
이춘선
1921년 5월 8일 한국과 러시아 국경지역인 북간도 육도포에서 태어났다. 열심인 교우 집안 출신의 어머니와 어려운 형편에도 신앙을 중요시한 농사꾼 아버지 덕분에 교회에서 신앙생활과 함께 글을 배웠다. 1936년 오병섭 타대오와 결혼하여 11남매를 두었으나 그중 셋은 어려서 잃었다. 1946년 공산주의가 세력을 넓히고 있던 북쪽에서 신앙생활이 여의치 않자 양양으로 왔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피난 온 강릉에서 평생을 살았다. 양양에 있을 때는 교리도 배우지 못해 첫영성체도 하지 못하던 아이들을 위해 교리교사가 되어 첫영성체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가난하고 여유 없는 살림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신앙을 가르쳐 1971년에 첫째(오상철 신부), 1981년에 셋째(오상현 신부), 1994년에 일곱째(오세호 신부), 1996년에 막내(오세민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어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4형제를 신부로 봉헌한 어머니가 되었다. 또한 1997년에 넷째(오진복 수녀)가 종신서원을 했고, 2006년에는 손자(오대석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영적인 구원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장례미사에서 부를 성가를 미리 선곡해 두어 틈틈이 자식들과 함께 부르는 등 열심히 죽음에 임할 준비를 하던 이춘선 마리아는 2015년 3월 11일 온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평소에 염원하던 대로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1921년 5월 8일 한국과 러시아 국경지역인 북간도 육도포에서 태어났다. 열심인 교우 집안 출신의 어머니와 어려운 형편에도 신앙을 중요시한 농사꾼 아버지 덕분에 교회에서 신앙생활과 함께 글을 배웠다. 1936년 오병섭 타대오와 결혼하여 11남매를 두었으나 그중 셋은 어려서 잃었다. 1946년 공산주의가 세력을 넓히고 있던 북쪽에서 신앙생활이 여의치 않자 양양으로 왔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피난 온 강릉에서 평생을 살았다. 양양에 있을 때는 교리도 배우지 못해 첫영성체도 하지 못하던 아이들을 위해 교리교사가 되어 첫영성체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가난하고 여유 없는 살림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신앙을 가르쳐 1971년에 첫째(오상철 신부), 1981년에 셋째(오상현 신부), 1994년에 일곱째(오세호 신부), 1996년에 막내(오세민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어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4형제를 신부로 봉헌한 어머니가 되었다. 또한 1997년에 넷째(오진복 수녀)가 종신서원을 했고, 2006년에는 손자(오대석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영적인 구원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장례미사에서 부를 성가를 미리 선곡해 두어 틈틈이 자식들과 함께 부르는 등 열심히 죽음에 임할 준비를 하던 이춘선 마리아는 2015년 3월 11일 온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평소에 염원하던 대로 하느님께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