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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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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893247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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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1/05/30
Pages/Weight/Size 144*217*30mm
ISBN 9788932471723
Description
“북학(北學)”이란 말은 『맹자』의 “진량은 초나라 사람이다. 그는 북쪽으로 유학하여(北學於中國) 북방의 학자들도 그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라는 구절에서 왔다. 박제가는 29세 때인 정조 2년 1778년에 종사관으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몇 달 머물면서 그는 농잠, 축목, 성곽, 궁실, 배, 수레에서부터 심지어 붓, 자[尺] 등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청나라의 습속 가운데 조선에서 시행할 만한 것과 날마다 사용하기에 편리한 것을 보고 듣는 대로 적었다. 그런 다음 맹자가 진량에 관해 말한 것을 따와 『북학의』라 지었다. 한마디로 『북학의』의 정신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의 궁핍과 척박함을 타파하자는 데 있다. 여기에는 당대의 아웃사이더 지식인으로서의 치열한 고민이 녹아 있다.
Contents
해제
서문 - 박제가
서문 - 박지원
서문 - 서명응

내편(內篇)
수레 / 배 / 성 / 벽돌 / 기와 / 자기 / 대자리 / 궁실 / 창호 / 뜰 / 도로 / 교량 / 축목 / 소 / 말 / 나귀 / 안장 / 구유 / 시장 / 장사 / 은 / 돈 / 쇠 / 재목 / 여자의 의복 / 극장 / 한어 / 통역 / 약 / 간장 / 인장 / 담요 / 저보 / 종이 / 활 / 총과 화살 / 자 / 문방구 / 고동서화

외편(外篇)
밭 / 거름 / 뽕나무와 과실 / 농업과 잠업에 관한 총론 / 이희경(李喜經)의 농기도서(農器圖序)를 첨부함 / 이희경의 용미차설(龍眉車說)을 첨부함 / 과거론 1 / 과거론 2 / 정유년 증광시사책을 첨부함 / 북학변(北學辯) 1 / 북학변 2 / 북학변 3 / 관론(官論) / 녹봉 제도 /
재부론(財富論) /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관하여 / 군사론 / 장례론 / 존주론(尊周論) / 병오년에 올린 소회

진북학의(進北學議)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 / 수레 구칙(九則) / 밭 / 거름 오칙(五則) / 뽕 / 농기 육칙(六則) / 쇠 / 볍씨 / 곡식 이름 / 지리(地利) 이칙(二則) / 논 / 수리 / 늙은 농부 / 구전 / 모내기 / 씨감자 / 말리(末利) / 유생의 도태 / 둔전 비용 / 하천 준설 삼칙(三則) / 창고 쌓기 이칙(二則) / 배 사칙(四則) / 오행을 잃고 버렸다는 것에 관해 / 번지(樊遲)와 허행(許行) / 기천영명(祈天永命) / 농업과 잠업에 관한 총론 / 재부론(財富論) /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관하여 / 존주론(尊周論)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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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박제가,이익성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으며, 수염이 많았다. 농담을 잘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배이자 검서관 동료인 성해응(成海應)은 박제가 사후에 박제가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정은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여 남의 뒤를 좇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기 천성이 가는대로 스스로 터득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어 그 예리한 칼날을 거의 맞설 수 없었다. 그를 힐난하는 자가 나타나면 기어코 꺾으려 애썼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도 요란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끝내 덮어 버릴 수 없다.” 박제가의 오만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강한 자부심, 호승심(好勝心)을 지적했는데 그를 용납하지 않는 적을 많이 만들어 낸 요인을 성격과 자부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지적이다. 게다가 박제가는 서자였다.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서자인 처지에 이런 성격과 능력과 태도를 지녔으니, 그는 주변에 숱한 적을 만들면서 문예와 학문에 종사한 것이다. 『북학의』에 표출된 선명하고 선이 굵은 주장은 그런 성격과 태도에도 잘 부합한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연암 박지원과 함께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으며, 수염이 많았다. 농담을 잘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배이자 검서관 동료인 성해응(成海應)은 박제가 사후에 박제가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초정은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여 남의 뒤를 좇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기 천성이 가는대로 스스로 터득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어 그 예리한 칼날을 거의 맞설 수 없었다. 그를 힐난하는 자가 나타나면 기어코 꺾으려 애썼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도 요란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끝내 덮어 버릴 수 없다.” 박제가의 오만하고 직선적인 성격과 강한 자부심, 호승심(好勝心)을 지적했는데 그를 용납하지 않는 적을 많이 만들어 낸 요인을 성격과 자부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지적이다. 게다가 박제가는 서자였다.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서자인 처지에 이런 성격과 능력과 태도를 지녔으니, 그는 주변에 숱한 적을 만들면서 문예와 학문에 종사한 것이다. 『북학의』에 표출된 선명하고 선이 굵은 주장은 그런 성격과 태도에도 잘 부합한다. 저서로는 『정유집』, 『북학의』, 『정유시고』,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