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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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893204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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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2/12/30
Pages/Weight/Size 130*200*35mm
ISBN 9788932041155
Categories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Description
“특별히 새롭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인간들은 어째서 입을 다물지 못할까?”

예리한 분석, 반짝이는 언어유희
프랑스 계몽주의 대표 사상가이자 이야기꾼,
몽테스키외의 풍자소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문인, 『법의 정신』의 저자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 Montesquieu, 1689~1755)의 소설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Lettres persanes』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81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근대 법치국가 정치 이론에 깊은 영향을 준 『법의 정신』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고, 소설가보다는 법조인, 정치가, 철학가로서 더 잘 알려진 몽테스키외는 수많은 저서를 남기며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 그가 30대 초반의 나이로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어놓고, 오늘날 프랑스 문학계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대열에 설 수 있게끔 해준 작품이 바로 서간체 풍자소설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이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페르시아인의 눈을 통해 우월감과 자만심에 가득 차 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이 소설은 초기 계몽주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당시 이 책이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것은 이 작품이 소설을 넘어 정치적 연대기이자 여행기, 사회 비평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은 전제정치 및 종교를 비판하고 유럽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등 몽테스키외 사상의 근간을 보여주며, 그의 대표 연구서 『법의 정신』을 예고하고 있다.
Contents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에 대한 몇 가지 고찰
서문

편지1~161

옮긴이 해설 · 18세기의 진정한 문학 선구자 몽테스키외, 그리고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작가 연보
기획의 말
Author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이자호
몽테스키외는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1689년에 보르도 시 근교의 샤토 라 브레드에서 귀족의 아들로 출생했다. 11세때 쥐이의 기숙제 중등학교에 들어가 5년간 데카르트 학파의 철학과 수학을 배우고, 그 후 보르도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5세인 1714년에 보르도 고등법원의 판사가 되고 2년 뒤에 백부가 사망하자 그 관직을 이어받아 원장이 되었다.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서간체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했다. 재치있는 기지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으로 그는 곧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해졌다. 그 후 그는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고, 1728년부터 3년간 로마,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이 여행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등을 저술하고, 또 10여 년에 걸쳐 3개의 정체론과 권력 분립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대저 <법의 정신>을 완성했다. 이 책은 곧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이나 찍었다. 그는 1755년에 파리에서 유행성 감기가 악화되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몽테스키외는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1689년에 보르도 시 근교의 샤토 라 브레드에서 귀족의 아들로 출생했다. 11세때 쥐이의 기숙제 중등학교에 들어가 5년간 데카르트 학파의 철학과 수학을 배우고, 그 후 보르도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5세인 1714년에 보르도 고등법원의 판사가 되고 2년 뒤에 백부가 사망하자 그 관직을 이어받아 원장이 되었다.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서간체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했다. 재치있는 기지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으로 그는 곧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해졌다. 그 후 그는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고, 1728년부터 3년간 로마,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이 여행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등을 저술하고, 또 10여 년에 걸쳐 3개의 정체론과 권력 분립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대저 <법의 정신>을 완성했다. 이 책은 곧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이나 찍었다. 그는 1755년에 파리에서 유행성 감기가 악화되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