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한 분석, 반짝이는 언어유희
프랑스 계몽주의 대표 사상가이자 이야기꾼,
몽테스키외의 풍자소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문인, 『법의 정신』의 저자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 Montesquieu, 1689~1755)의 소설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Lettres persanes』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81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근대 법치국가 정치 이론에 깊은 영향을 준 『법의 정신』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고, 소설가보다는 법조인, 정치가, 철학가로서 더 잘 알려진 몽테스키외는 수많은 저서를 남기며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 그가 30대 초반의 나이로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어놓고, 오늘날 프랑스 문학계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대열에 설 수 있게끔 해준 작품이 바로 서간체 풍자소설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이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페르시아인의 눈을 통해 우월감과 자만심에 가득 차 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이 소설은 초기 계몽주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당시 이 책이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것은 이 작품이 소설을 넘어 정치적 연대기이자 여행기, 사회 비평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은 전제정치 및 종교를 비판하고 유럽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등 몽테스키외 사상의 근간을 보여주며, 그의 대표 연구서 『법의 정신』을 예고하고 있다.
Contents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에 대한 몇 가지 고찰
서문
편지1~161
옮긴이 해설 · 18세기의 진정한 문학 선구자 몽테스키외, 그리고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작가 연보
기획의 말
Author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이자호
몽테스키외는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1689년에 보르도 시 근교의 샤토 라 브레드에서 귀족의 아들로 출생했다. 11세때 쥐이의 기숙제 중등학교에 들어가 5년간 데카르트 학파의 철학과 수학을 배우고, 그 후 보르도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5세인 1714년에 보르도 고등법원의 판사가 되고 2년 뒤에 백부가 사망하자 그 관직을 이어받아 원장이 되었다.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서간체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했다. 재치있는 기지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으로 그는 곧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해졌다. 그 후 그는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고, 1728년부터 3년간 로마,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이 여행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등을 저술하고, 또 10여 년에 걸쳐 3개의 정체론과 권력 분립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대저 <법의 정신>을 완성했다. 이 책은 곧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이나 찍었다. 그는 1755년에 파리에서 유행성 감기가 악화되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몽테스키외는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1689년에 보르도 시 근교의 샤토 라 브레드에서 귀족의 아들로 출생했다. 11세때 쥐이의 기숙제 중등학교에 들어가 5년간 데카르트 학파의 철학과 수학을 배우고, 그 후 보르도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5세인 1714년에 보르도 고등법원의 판사가 되고 2년 뒤에 백부가 사망하자 그 관직을 이어받아 원장이 되었다.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서간체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했다. 재치있는 기지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으로 그는 곧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해졌다. 그 후 그는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고, 1728년부터 3년간 로마,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이 여행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등을 저술하고, 또 10여 년에 걸쳐 3개의 정체론과 권력 분립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대저 <법의 정신>을 완성했다. 이 책은 곧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이나 찍었다. 그는 1755년에 파리에서 유행성 감기가 악화되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