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저술인 『매씨서평梅氏書平』을 역주한 것이다. 유교(儒敎)의 경전(經典) 가운데 중요한 전적으로 오늘까지 전해오는 『상서尙書』에 대해, 그 일부분이 위작(僞作)임을 구체적인 고증을 통해 밝혀놓은 것이 『매씨서평』이며, 다산의 저술 가운데에서도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이룬 역작이다. 여기에는 청대(淸代) 고증학자들을 능가하는 그의 이론이 담겨 있고, 조선 왕조 후기의 실학(實學)을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는 논지가 많다.
유교의 경전에는 십삼경(十三經)이 있다. 이들 경전 가운데 『효경孝經』도 그러하지만, 특히 『상서』 58편 가운데 25편은 위고문(僞古文)이다. 다산은 이 25편의 경문(經文)이 위작임을,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여 실사구시의 자세로 일일이 고증하였다. 청대의 고증학적 학풍을 받아들여 세밀하게 논거를 대어 고거(考據)해놓은 정치한 논지는 그의 학문 토대의 논리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Contents
서남 동양학자료총서 간행사
책을 내면서
일러두기
해제『매씨서평』에 대하여
[역주본]
매씨서평 1
매씨서평 2
매씨서평 3
매씨서평 4
매씨서평 5
매씨서평 6
매씨서평 7
매씨서평 8
매씨서평 9
매씨서평 10
염씨고문소증초
[원문(原文) 교주본(校註本)]
梅氏書平 一
梅氏書平 二
梅氏書平 三
梅氏書平 四
梅氏書平 五
梅氏書平 六
梅氏書平 七
梅氏書平 八
梅氏書平 九
梅氏書平 十
閻氏古文疏證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36년 별세하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백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