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계급론

제도 진화의 경제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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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4/07/30
Pages/Weight/Size 141*212*30mm
ISBN 9788931023633
Categories 사회 정치 > 사회학
Description
과시적 소비와 유한계급의 기원을 그 근본까지 추적하여
시대를 뛰어넘어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경종을 울리는 고전

★경제학·사회학 최고의 고전 『유한계급론』 원전 완역본
★작품의 의의와 역사적 배경, 동시대적 의의를 짚는 해설 수록

“19세기 미국 경제학자의 저술 중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책은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뿐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말이다. 소유의 근원적 동기를 ‘필요’가 아닌 ‘경쟁심’에서 찾은 베블런의 통찰은 19세기, 20세기를 거쳐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형형하다.

왜 사람들은 소득 수준 이상의 사치품을 구매할까? 특권적 소수만이 몰두하는 비생산적인 학문, 예술 등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왜 적당히 만족하는 법을 모르고 계속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할까? 왜 서로 다른 계급적 이해를 가진 부유층과 빈곤층은 모두 보수적일까? 사회 기여 활동은 정말 순수한 목적에 기반할까? 교육은 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할까? 모두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천착하고 해명한 질문이다. 우리는 아직 베블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깃든 본질적 허영을 간파하고 폭로했다. 유한계급을 추동하는 욕망의 작동 원리뿐 아니라 그 욕망이 초래한 구체적 현상까지도 세세하게 분석해 과시적 욕망에 찌든 사회상을 총체적으로 그려냈다. 베블런의 도발적인 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가정을 절대화한 주류 경제학에 파문을 일으켰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이 품은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문제의식 때문에 끊임없이 주류 학계에서 외면받는 지적 방랑이라는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출간 후 100년이 훌쩍 지난 이 책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다시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한계급론』의 사유는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 오히려 하루가 멀다 하고 과시적 소비에 대한 자극적인 뉴스가 쏟아지는 지금, 더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Contents
옮긴이 머리말
머리말

1장 서론
2장 재력 경쟁
3장 과시적 여가
4장 과시적 소비
5장 생활의 금전적 기준
6장 미적 감각의 금전적 기준
7장 금전 문화의 표현인 옷
8장 노동 면제와 보수주의
9장 고대적 특성의 보존
10장 용맹의 현대적 보존
11장 요행을 바라는 마음
12장 종교 의례
13장 차별화에 무관심한 기질의 보존
14장 금전 문화의 표현인 고등교육

옮긴이 해제
Author
소스타인 베블런,박홍규
19세기 미국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 주 카토 부근의 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났다. 1880년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지만 예일 대학교에서 1884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가족이 사는 농촌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작업을 했다. 베블런은 1892년이 되어서야 시카고 대학교의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진리, 즉 ①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 ②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술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책은 경제이론 뿐 아니라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 덕분에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며 마르크스의 체계는 지속력도 없고 사고력도 부족하다고 단언했다. 베블런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집필에 더욱 열중해 <제작본능과 산업기술의 실태>(1911) <독일 제국과 산업혁명>(1915)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 <미국의 고등교육>(1918) 등을 펴냈다.

그는 사망하기 전 10여 년간을 뉴욕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연구소’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는 <기득권과 산업기술의 현황>(1919)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1923) 등이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락스다엘라 사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했던 대공황이 엄습하기 얼마 전인 1929년 8월 3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근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저서 <변화하는 우리의 질서에 관한 단상들>은 그가 죽은 뒤 1934년에 출간되었다. 독자들은 늘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다.
19세기 미국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 주 카토 부근의 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났다. 1880년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지만 예일 대학교에서 1884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가족이 사는 농촌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작업을 했다. 베블런은 1892년이 되어서야 시카고 대학교의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진리, 즉 ①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 ②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술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책은 경제이론 뿐 아니라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 덕분에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며 마르크스의 체계는 지속력도 없고 사고력도 부족하다고 단언했다. 베블런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집필에 더욱 열중해 <제작본능과 산업기술의 실태>(1911) <독일 제국과 산업혁명>(1915)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 <미국의 고등교육>(1918) 등을 펴냈다.

그는 사망하기 전 10여 년간을 뉴욕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연구소’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는 <기득권과 산업기술의 현황>(1919)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1923) 등이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락스다엘라 사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했던 대공황이 엄습하기 얼마 전인 1929년 8월 3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근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저서 <변화하는 우리의 질서에 관한 단상들>은 그가 죽은 뒤 1934년에 출간되었다. 독자들은 늘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