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세계 최저 출산율은 큰 국제적 관심거리이지만 국가의 광범위한 저출산 대책과 엄청난 재정 투입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하향세를 멈출 조짐이 전혀 없다는 점 자체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실 정부의 저출산 대응 지출은 그 실제 내용의 적합성을 면밀히 따져보아야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심화 일로의 저출산이 국가 차원의 제도와 지출만으로 뚜렷이 변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은 저출산에 국한되지 않고 비혼, 만혼, 이혼 등 혼인 위기(?), (노인이 특별히 심각하지만)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높은 자살률 등 생명, 가족, 인구를 아우르는 이른바 사회재생산 전반의 근본 위기 상황에 대해 제기된다. 아울러 그동안 한국인들의 삶을 사회 ·경제적으로 지탱해 온 농민과 노동자로서의 직업지위 역시 광범위한 불안정성에 직면해 농가와 도시노동자 가구의 안정적 사회재쟁산이 와해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경제·사회적 기본질서를 가족자유주의(familial liberalism)로서 개념·이론화하고, 이 기본질서가 국가 주도의 산업자본주의 체제 및 한국인의 생활세계 원리와 전략에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분석하고, 이 관계를 바탕으로 후기개발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인구, 가족, 계급(직업)에 걸친 급진적인 사회재생산 위기가 발생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한국인들의 가족은 단순히 사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이나 관계를 넘어 (개발)자본주의 체제에서 기본적이며 더러는 배타적이기까지 한 책임, 권리, 자유의 정치경제적 단위(political economic unit)이다. 이처럼 가족에 정치경제적 단위로서의 성격이 보편화되어 있음으로써 한국인들의 가족관계와 가정생활은 국가경제 등에 대두되는 거시적 혼란이나 위기에 매우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반응한다.
한국인들은 전략적 생존을 위해 가족 구성과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정·재조정해 왔으며, 거시적 생존환경의 격변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는 가족 구성과 관계의 격변으로 즉각 이어져 왔다. 한국인들이 가족관계의 유효한 범위, 강도, 기간을 실용적으로 재조정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에서 비롯되는 인구붕괴 및 지역해체 조짐은 일반 시민들이 국가, 사회, 자본주의 경제와 공유하는 가족자유주의의 고질성에 대한 역설적 증거이다. 그것은 가족자유주의적 개인과 가족들의 사회재생산에 관한 일종의 자기부과적인 구조조정의 결과이다.
국가와 사회가 절박하게 바라는 인구 회복과 지역 유지(재생)는 가족자유주의 정치경제와 사회정책 체계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필요성은 사회재생산에 대한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국가, 사회, 기업의 지원과 협력으로 가족·인구 및 지역·산업(직업)의 차원에서 장기적인 안정성을 구가해 온 서유럽의 복지국가적 맥락에서 뚜렷이 반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