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혼’에 대한 해명을 통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본성론’과, 그의 존재 형이상학과 밀접하게 연관된 형이상학적 인간학에 대한 논의가 담긴 책이다. 인간 영혼의 본성 특히 지성의 본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개진한 내용을 시작으로, 가능지성의 단일성, 능동지성의 존재 여부 및 단일성, 인간 영혼의 복합성, 천사와 인간 영혼의 본성적 동일성 여부, 인간 영혼의 불멸성 및 분리된 영혼의 상태와 기능 등 21개의 문제들을 다룬다.
Contents
옮긴이 머리말
제1문 영혼은 형상이면서 동시에 ‘이 어떤 것’일 수 있는가
제2문 인간 영혼은 그 존재에서 육체와 분리되는가
제3문 가능지성 혹은 지적 영혼은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나인가
제4문 능동지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는가
제5문 능동지성은 하나이며 분리되어 있는가
제6문 영혼은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되어 있는가
제7문 천사와 영혼은 종적으로 서로 다른가
제8문 지적 영혼은 인간의 육체 같은 그러한 육체와 결합해야만 하는가
제9문 영혼은 매개를 통해 육체적 질료에 결합해야 하는가
제10문 영혼은 육체 전체 안에 그리고 그 부분들 각각 안에 있는가
제11문 인간에게 이성혼과 감각혼과 생장혼은 하나의 실체인가
제12문 영혼은 자기 자신의 능력인가
제13문 영혼의 능력들은 그 대상에 의해 구별되는가
제14문 인간 영혼은 불멸하는가
제15문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이해하기를 할 수 있는가
제16문 육체와 결합된 영혼은 분리된 실체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제17문 분리된 영혼은 분리된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제18문 분리된 영혼은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는가
제19문 분리된 영혼 안에 감각능력들이 남아 있는가
제20문 분리된 영혼은 개별자를 인식하는가
제21문 분리된 영혼은 물리적 불에 의한 형벌의 고통을 겪을 수 있는가
옮긴이 해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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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토마스 아퀴나스,이재룡,이경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는 이탈리아 남부의 아퀴노(Aquino)라는 마을 근처 로카세카(Rocasecca) 성(城)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가 되던 해에 그는 근처의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에 봉헌되어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14세에는 인근 나폴리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 나폴리에서 새로운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수도회 총장의 뜻을 따라 당시 신학의 중심지인 파리 대학으로 가고자 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감금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파리에서 위대한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밑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257년에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와 함께 파리 대학 교수단에 받아들여졌다. 1259년 그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가 9년 동안 교황청 소속의 학원과 수도원 등에서 강의했으며, 1269~72년까지는 다시 파리 대학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 활동은 절정에 이르렀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통한 주석자임을 자처하던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옹호했다. 교황에 의해 리옹 공의회에 초청되어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한 시토회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세상을 떠났다. 1323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으며, 1879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인 「영원한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그를 현대 가톨릭 철학의 스승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방대한 분량의 『신학대전』을 비롯해 『대이교도대전』, 『신학요강』 등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보에티우스 등의 저서에 대한 다양한 주해서를 남겼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는 이탈리아 남부의 아퀴노(Aquino)라는 마을 근처 로카세카(Rocasecca) 성(城)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가 되던 해에 그는 근처의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에 봉헌되어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14세에는 인근 나폴리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 나폴리에서 새로운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수도회 총장의 뜻을 따라 당시 신학의 중심지인 파리 대학으로 가고자 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감금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파리에서 위대한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밑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257년에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와 함께 파리 대학 교수단에 받아들여졌다. 1259년 그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가 9년 동안 교황청 소속의 학원과 수도원 등에서 강의했으며, 1269~72년까지는 다시 파리 대학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 활동은 절정에 이르렀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통한 주석자임을 자처하던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옹호했다. 교황에 의해 리옹 공의회에 초청되어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한 시토회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세상을 떠났다. 1323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으며, 1879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인 「영원한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그를 현대 가톨릭 철학의 스승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방대한 분량의 『신학대전』을 비롯해 『대이교도대전』, 『신학요강』 등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보에티우스 등의 저서에 대한 다양한 주해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