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집

성리학의 이상향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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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892840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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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3/04/11
Pages/Weight/Size 128*188*30mm
ISBN 9788928401857
Categories 인문 > 한국철학
Description
우리 역사상 가장 천재적이고 열정적인 인물 중의 한 명이었던 이이의 삶을 그의 저작을 통해 새롭게 조명한다. 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편이지만 그의 저작과 삶을 하나로 꿰는 작품 선집은 아직까지 없었다. 『율곡집 : 성리학의 이상향을 꿈꾸다』은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이이의 전 저작 중에서 그를 가장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고, 이를 시기별로 재구성하였다. 여타 선집이 주제별 구성이나 원 문집의 문체별 분류 체제를 따르는 것과 달리 크게 유년-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하여 작품을 엮고, 평설을 덧붙임으로써 자연스럽게 한 인물의 시기별 행적과 사유의 흐름, 시대의 변화상을 알 수 있게 하였다.
Contents
이이는 누구인가

제1장 사임당의 보살핌 속에
화석정 |돌아가신 어머님 행장

제2장 길을 찾아 나선 길
최입지에게|동문을 나서며|길을 가다가|산중에서|풍악산 작은 암자에서 노승에게 주다|자경문|자잘한 이야기|천도책|시를 재촉하는 비

제3장 시대의 물음에 답하여
요승 보우를 논하는 소|간원에서 시사를 아뢰는 소|경연일기 1567년 10월|기대승에게|퇴계 선생에게 올립니다|동호문답|퇴계 선생에게 올립니다|서원향약|성혼에게|정언묘선 서문|만언봉사|경연일기 1575년 5월
성학집요를 올리는 차자

제4장 우국충정을 남기고
격몽요결|정사의 학도에게 보이는 글|배 안에서 남산을 돌아보고 허전하여 짓다|눈 속에 소를 타고 성혼을 찾아가다|도봉서원 기문|구용첩 발문|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지명|학부통변 발문|인심도심에 관한 그림과 설명|김시습전|극기복례에 대한 설|생질 홍석윤에게 주는 글|말과 행실의 어려움|서울을 떠나 배를 타고 해주로 내려가며|서 어사에게 주는 방략 여섯 조목

연보
Author
이이,김태완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