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이름은 미셸 로빈슨Michelle Robinson)
1964년 시카고의 변두리인 사우스사이드에서 태어나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시 정수처리장의 노동직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와 직장 일을 번갈아가며 두 남매를 단단하게 키워냈다. 미셸의 집안은 무엇이든 힘껏 노력하도록 격려하는 한편 거의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가풍을 갖고 있었고, 이는 두 남매에게 큰 정신적 자산이 되어준다. 오빠 크레이그는 농구선수로 대성해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어린 미셸 역시 신흥 명문인 휘트니 영 고등학교를 거쳐 프린스턴대 사회학과에 진학한다. 그 후 하버드대 로스쿨을 거쳐 시들리 앤드 오스틴 법률 회사에 변호사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인턴 사원으로 들어온 버락 오바마의 멘토를 맡게 된다. 결국 미셸과 버락은 사내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하고 말리아와 사샤라는 두 자매를 둔다.
미셸은 결혼 후 법률 회사를 나와 보다 공적인 활동을 위해 시카고 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퍼블릭 앨라이스(Public Allies)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청년들을 공공 부문에 진출시키는 활동을 한다. 그 후 시카고 대학에서 대학과 지역 공동체를 연결하는 일을 한 후 시카고대학병원 부사장까지 이르지만, 2008년 남편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돕고 가정생활을 지키기 위해 사임한다. 당시 버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던 연설은 길이 남는 명연설로 꼽힌다. 2009년 버락 오바마가 44대 미 대통령이 됨에 따라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백악관에 입성한 후로는 역대 퍼스트레이디와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 늘 화제의 중심이 됐다. 솔직하고 소탈한 생활방식을 유지했으며, TV 쇼에 나가서 춤을 선보이는가 하면 차 안에서 팝송을 부르는 모습 등을 공개함으로써 무거웠던 퍼스트레이디 이미지를 부수고 백악관을 친근한 곳으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아동 비만과 그 배후에 있는 식품산업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소외된 사람들과 여성들의 교육 개선에도 힘썼다.
그 자신이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의 후손이며 비주류였던 관계로 늘 주류의 시선과 편견, 강압에 맞서야 했지만, 결국 그 모두를 끌어안고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시대 여성과 약자들을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최근에는 이런 그녀의 비전을 두고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평가하는 의견들이 많다. 어떤 경우든, 소수자와 다양성, 공존과 지속가능성이 가장 큰 화두로 부각되는 오늘날 그녀가 가진 상징성과 비전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가능성으로 다가갈 것이다.
(결혼 전 이름은 미셸 로빈슨Michelle Robinson)
1964년 시카고의 변두리인 사우스사이드에서 태어나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시 정수처리장의 노동직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와 직장 일을 번갈아가며 두 남매를 단단하게 키워냈다. 미셸의 집안은 무엇이든 힘껏 노력하도록 격려하는 한편 거의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가풍을 갖고 있었고, 이는 두 남매에게 큰 정신적 자산이 되어준다. 오빠 크레이그는 농구선수로 대성해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어린 미셸 역시 신흥 명문인 휘트니 영 고등학교를 거쳐 프린스턴대 사회학과에 진학한다. 그 후 하버드대 로스쿨을 거쳐 시들리 앤드 오스틴 법률 회사에 변호사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인턴 사원으로 들어온 버락 오바마의 멘토를 맡게 된다. 결국 미셸과 버락은 사내 연애를 거쳐 결혼에 골인하고 말리아와 사샤라는 두 자매를 둔다.
미셸은 결혼 후 법률 회사를 나와 보다 공적인 활동을 위해 시카고 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퍼블릭 앨라이스(Public Allies)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청년들을 공공 부문에 진출시키는 활동을 한다. 그 후 시카고 대학에서 대학과 지역 공동체를 연결하는 일을 한 후 시카고대학병원 부사장까지 이르지만, 2008년 남편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돕고 가정생활을 지키기 위해 사임한다. 당시 버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던 연설은 길이 남는 명연설로 꼽힌다. 2009년 버락 오바마가 44대 미 대통령이 됨에 따라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백악관에 입성한 후로는 역대 퍼스트레이디와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 늘 화제의 중심이 됐다. 솔직하고 소탈한 생활방식을 유지했으며, TV 쇼에 나가서 춤을 선보이는가 하면 차 안에서 팝송을 부르는 모습 등을 공개함으로써 무거웠던 퍼스트레이디 이미지를 부수고 백악관을 친근한 곳으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아동 비만과 그 배후에 있는 식품산업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소외된 사람들과 여성들의 교육 개선에도 힘썼다.
그 자신이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의 후손이며 비주류였던 관계로 늘 주류의 시선과 편견, 강압에 맞서야 했지만, 결국 그 모두를 끌어안고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시대 여성과 약자들을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최근에는 이런 그녀의 비전을 두고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평가하는 의견들이 많다. 어떤 경우든, 소수자와 다양성, 공존과 지속가능성이 가장 큰 화두로 부각되는 오늘날 그녀가 가진 상징성과 비전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가능성으로 다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