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시전집 8 (큰글씨책)

악부 2
$48.60
SKU
9791128865602
+ Wish
[Free shipping over $100]

Standard Shipping estimated by Fri 01/10 - Thu 01/16 (주문일로부 10-14 영업일)

Express Shipping estimated by Tue 01/7 - Thu 01/9 (주문일로부 7-9 영업일)

* 안내되는 배송 완료 예상일은 유통사/배송사의 상황에 따라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Publication Date 2022/07/28
Pages/Weight/Size 210*297*30mm
ISBN 9791128865602
Categories 소설/시/희곡 > 고전문학
Description
이백시문학회에서 이백 시전집을 완역한다. 오랫동안 이백을 연구해 온 14명의 전문 학자가 국내외 모든 이백 관련서를 참고하고 수차례의 윤독과 토론을 거쳐 가장 완벽한 정본에 도전한다. 제8권은 〈악부〉 160수 중 40수를 옮겼다. 〈독록편(獨?篇)〉, 〈왕소군(王昭君)〉, 〈장간 마을의 노래(長干行)〉 등 이백의 대표적인 악부시들을 만날 수 있다. 정확한 번역과 방대한 주석, 다양한 교감과 상세한 해설은 이백 시를 처음 만나는 사람부터 전문 연구자까지 모두에게 이백 시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 줄 것이다.
Contents
제1수 독록편(獨?篇)
제2수 높은 산에 올라 먼바다를 바라보네(登高丘而望遠海)
제3수 따뜻한 봄의 노래(陽春歌)
제4수 양반아(楊叛兒)
제5수 제비 한 쌍의 이별(雙燕離)
제6수 산사람이 술을 권하다(山人勸酒)
제7수 우전에서 꽃을 따며(于?採花)
제8수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한탄하는 노래(鞠歌行)
제9수 그윽한 골짜기의 샘물(幽澗泉)
제10수 왕소군. 첫째 수(王昭君 其一)
제11수 왕소군. 둘째 수(王昭君 其二)
제12수 중산왕 유자첩의 노래(中山孺子妾歌)
제13수 형주의 노래(荊州歌)
제14수 벽사 놀이 공연의 고취곡 <치자반> 곡사(設?邪伎鼓吹雉子班曲辭)
제15수 만남의 노래(相逢行)
제16수 옛날에 그리워하는 이 있어(古有所思)
제17수 오랜 이별(久別離)
제18수 연밥 따며 부르는 노래(採蓮曲)
제19수 백발의 노래 두 수(白頭吟 二首)
제20수 백발의 노래. 둘째 수(白頭吟 其二)
제21수 임강왕과 강개한 선비의 노래(臨江王節士歌)
제22수 사마 장군에 대한 노래(司馬將軍歌)
제23수 임금의 길(君道曲)
제24수 신발 끈 매어 주는 사람(結襪子)
제25수 젊은이들 모인 곳에서 협객과 사귀네(結客少年場行)
제26수 장간 마을의 노래. 두 수 중 첫째 수(長干行 二首 其一)
제27수 장간 마을의 노래. 두 수 중 둘째 수(長干行 二首 其二)
제28수 임금께서 회중궁(回中宮)으로 가시네(上之回)
제29수 옛 밝은 달의 노래(古朗月行)
제30수 외로이 만나지 못하네(獨不見)
제31수 하얀 모시 춤의 노래. 첫째 수(白紵辭 其一)
제32수 하얀 모시춤의 노래. 둘째 수(白紵辭 其二)
제33수 흰 모시 춤의 노래. 셋째 수(白紵辭 其三)
제34수 기러기 울음소리(鳴雁行)
제35수 여인의 박복한 운명(妾薄命)
제36수 유주의 북방 말 탄 협객의 노래(幽州胡馬客歌)
제37수 문 앞에 마차 타고 온 손님의 노래(門有車馬客行)
제38수 군자는 염려하는 바가 있으니(君子有所思行)
제39수 동해의 용감한 부인(東海有勇婦)
제40수 황갈 칡(黃葛篇)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 후기
옮긴이에 대해
Author
이백,이백시문연구회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의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고 이 한림(李翰林)이라고도 부른다. 별칭으로 적선謫仙이라 불리기도 했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며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백의 출생과 어린 시절은 명확하지 않다. 전해지는 바로는 조적(祖籍)은 지금의 간쑤성 톈수이(天水) 부근의 농서현(?西縣) 성기(成紀)였으나, 수나라 말기에 부친이 서역으로 이사해 서안도호부 관할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 이백을 낳았고, 부친이 다시 사천성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청련향(靑蓮?)으로 옮겨 옴에 따라 이백 또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725년(25세) 촉 땅을 떠나서 장강을 따라 삼협을 거쳐 강남 일대를 유람했으며 산동, 산서 등지를 떠돌며 도교(道敎)에 심취했다. 742년(42세) 도사 오균(吳筠)의 추천으로 한림공봉(翰林供奉)에 제수되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자 3년 만에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 다시 방랑의 길로 들어선다.
755년(55세) 안녹산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백은 안휘성 선성(宣城)에 있었다. 57세에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의 막료가 되었으나, 영왕이 권력 투쟁에서 패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이백도 역도로 몰려 강서성 심양(尋陽)에 투옥되었다. 송약사(宋若思)가 구명해 그의 막료가 되었으나 끝내 귀주성 야랑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 삼협을 거슬러 무산에 당도했을 때 특사를 받아 강릉으로 내려가며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을 지었다.

이후 노쇠한 이백은 금릉과 선성을 오가다가 당도(當塗) 현령으로 있던 친척 이양빙(李陽?)에게 몸을 의탁했다. 762년 병이 중해지자 이백은 자신의 원고를 이양빙에게 주고 「임종가(臨終歌)」를 짓고는 회재불우의 한 많은 한평생을 끝마쳤다. 우리에게는 당도에 있는 채석기(採石磯)에서 노닐다 장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이 훨씬 더 익숙하다.

이백은 굴원 이후 가장 뛰어난 낭만주의자로 꼽힌다. 그는 당시의 민간 문예뿐 아니라 진한(秦漢)과 위진(魏晉) 이래 악부 민가를 이어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했다. 더구나 그는 도가에 심취해서 그의 시는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환상적인 경향 또한 짙다. 이백의 문장은 거의 모든 문장 형식을 망라하고 있어 그가 다양한 종류의 글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을 대붕大鵬에 비유하며 기상을 떨치고자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에는 호방하고 높은 기상이 빛나며 타고난 상상력으로 불후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미쳤으며 지금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애송하고 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의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고 이 한림(李翰林)이라고도 부른다. 별칭으로 적선謫仙이라 불리기도 했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며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백의 출생과 어린 시절은 명확하지 않다. 전해지는 바로는 조적(祖籍)은 지금의 간쑤성 톈수이(天水) 부근의 농서현(?西縣) 성기(成紀)였으나, 수나라 말기에 부친이 서역으로 이사해 서안도호부 관할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 이백을 낳았고, 부친이 다시 사천성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청련향(靑蓮?)으로 옮겨 옴에 따라 이백 또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725년(25세) 촉 땅을 떠나서 장강을 따라 삼협을 거쳐 강남 일대를 유람했으며 산동, 산서 등지를 떠돌며 도교(道敎)에 심취했다. 742년(42세) 도사 오균(吳筠)의 추천으로 한림공봉(翰林供奉)에 제수되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자 3년 만에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 다시 방랑의 길로 들어선다.
755년(55세) 안녹산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백은 안휘성 선성(宣城)에 있었다. 57세에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의 막료가 되었으나, 영왕이 권력 투쟁에서 패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이백도 역도로 몰려 강서성 심양(尋陽)에 투옥되었다. 송약사(宋若思)가 구명해 그의 막료가 되었으나 끝내 귀주성 야랑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 삼협을 거슬러 무산에 당도했을 때 특사를 받아 강릉으로 내려가며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을 지었다.

이후 노쇠한 이백은 금릉과 선성을 오가다가 당도(當塗) 현령으로 있던 친척 이양빙(李陽?)에게 몸을 의탁했다. 762년 병이 중해지자 이백은 자신의 원고를 이양빙에게 주고 「임종가(臨終歌)」를 짓고는 회재불우의 한 많은 한평생을 끝마쳤다. 우리에게는 당도에 있는 채석기(採石磯)에서 노닐다 장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이 훨씬 더 익숙하다.

이백은 굴원 이후 가장 뛰어난 낭만주의자로 꼽힌다. 그는 당시의 민간 문예뿐 아니라 진한(秦漢)과 위진(魏晉) 이래 악부 민가를 이어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했다. 더구나 그는 도가에 심취해서 그의 시는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환상적인 경향 또한 짙다. 이백의 문장은 거의 모든 문장 형식을 망라하고 있어 그가 다양한 종류의 글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을 대붕大鵬에 비유하며 기상을 떨치고자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에는 호방하고 높은 기상이 빛나며 타고난 상상력으로 불후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미쳤으며 지금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애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