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계는 17세기 후반 우리나라 명현(名賢)의 한 사람으로 당시 조야(朝野)의 청의(淸議)를 대표하였고, 그의 사상과 이론은 성리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27권 14책의 많은 논저를 남겼다. 이 시기 일반 학자들의 문집에 비하여 양적으로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문집의 내용이다. 이 책은 한 구도자로서 경전(經典)의 연구와 심신 수양에 관해서 진지한 본의탐구와 엄숙한 자기성찰로 일관하였고 나아가 우국(憂國)의 충정에서 탁월하고도 간독(懇篤)한 경세적(經世的)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꽉 차 있다. 이러한 창계의 정신 유산이 오늘날 세상에 보급되지 못하고 오직 몇몇 사람들의 보장(寶藏)으로만 이어져 전해 오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창계집』을 고전번역총서의 하나로 출판함으로써 학계의 연구자와 일반인들에게 창계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649년(인조27)∼1696년(숙종2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이다.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7)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67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천인성명설(天人性命說)을 깊이 연구하였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기호학파의 일원이지만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을 전개하였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 제향되었다.
1649년(인조27)∼1696년(숙종2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이다.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7)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67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천인성명설(天人性命說)을 깊이 연구하였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기호학파의 일원이지만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을 전개하였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