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현전하는 원효의 저술 가운데 비교적 말년에 저술되었다. 본 논은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로서, 여기에 수록된 다양한 불교사상 및 그에 대한 원효의 견해는 당시 신라에서 진행되었던 불교 교학에 대한 연구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금강삼매경』은 「서품」의 서분, 7품의 정설분, 유통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설분의 일곱 품은 각각 독립된 내용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관통해 있다. 그러므로 이 『금강삼매경론』은 일미관행에 대한 이해의 입장에 따라서 사상 및 교리 내지 선수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논서로 파악된다.
『한국불교전서』 제1책에 수록되어 있는 『금강삼매경론』은 조선불교회본朝鮮佛敎會本(劉敬鐘 교정본)을 저본으로 하고, 고려대장경 보유판을 갑본으로 교감한 것이다. 본 번역본에서는 『금강삼매경론』에 인용된 경문에 대해서는 갑본 이외에 『대정신수대장경』 제9권에 수록된 『금강삼매경』,『만신찬속장경』에 수록된 것으로 중국의 명대에 원징圓澄이 주석한 『금강삼매경주해金剛三昧經注解』 4권 속의 경문, 『만신찬속장경』에 수록된 것으로 청대에 적진寂震이 주석한 『금강삼매경통종기金剛三昧經通宗記』 12권 속의 경문 등을 비교하여 교감하였다.
신라 진평왕 39년(617) 압량군 불지촌(현 경북 경산)에서 출생했다. 소년 때(16세) 출가하여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치열하게 수행하였고, 지음知音의 도반 의상義相(625-702)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다가 깨달음 성취로 인한 자신감이 생겨 유학을 그만두었으며, 서민 대중들에게는 신뢰와 희망의 대상이었고, 권력과 제도권 승려들에게는 불편하면서도 경외의 대상이었던 인물. 왕족 과부와 결혼하여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이 된 설총薛聰을 낳고는 환속하여 비승비속非僧非俗인 거사居士로서 수행하기도 하였던 인물. 특정한 삶의 유형과 진영에 소속되거나 머물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듯 내달렸던 인물. 신분이 미천한 대중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부처 되는 길을 알리려고 춤과 노래 등 다양하고도 파격적인 실험을 하였고, 심오한 체득과 혜안을 웅혼한 필력으로 종횡무진 글에 담아내어 당대 최고 수준의 불교지성을 동아시아 전역에 흩뿌렸던 인물. 인도의 불교논리학 대가인 진나陳那(Dign?ga)의 문도가 당나라에 왔다가 입수하여 읽고는 감탄하여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 인도에 보냈다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지은 인물. 그와의 밀접한 연관에서 한반도에서 찬술된 것으로 보이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관한 최초/최고의 주석인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여 자신의 불교 탐구와 안목을 총정리하고 있는 인물. 만년에는 토굴같이 누추한 절(穴寺)에서 수행하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던 인물. ―현존하는 원효 관련 기록에서 포착되는 단면들이다.
이칭異稱, 진찬眞撰 여부 등을 감안할 때, 대략 80여 부 200여 권이 확인되는 그의 저술의 양과 질은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히 최고 수준이다. 양으로만 보아도 한반도에서 그를 능가하는 경우가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대저술가였던 천태 지의智?(538-597, 30여 부)나 화엄 법장法藏(643-712, 50여 부), 법상 규기窺基(632-682, 50여 부)도 원효에 비견되기 어렵다. 그의 80여 종 저서 중에서 완본으로 전하는 것이 13종, 잔본殘本이 8종이다. 잔본까지 합하여도 21종 저서가 현존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