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꽃이 핀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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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2/24
Pages/Weight/Size 128*188*30mm
ISBN 9791128891687
Categories 사회 정치 > 사회비평/비판
Description
1~9권은 화성외국인센터 한윤수 소장이 기록한 895편의 외국인 노동자 상담 사례이고 10권은 이에 대한 해설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 책은 그들을 제대로 알기 위한 리얼한 생활 현장 이야기이고 삶에 관한 생생하고 진실한 최초의 기록이다. 외국인 200만 시대! 한국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경제의 근간을 떠받치는 그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동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산업현장뿐만 아니라 농어업에서도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 없이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들 삶에 관한 기록이 우리에겐 없다.
Contents
겨울 닭은 좀처럼 울지 않는다
손목 힘 안 쓰는 공장
화성이 해결되면 전국이 해결된다
사장님의 취권
고장 난 센터 애마
고용센터 팀장 잘못 건드렸다
목사님 코는 개코
삼각 김밥처럼 똘똘 뭉친 태국인 셋
근로감독관을 짝사랑하다
퇴직금 더 줘도 걱정
내가 사는 국립 호텔
똘똘해진 태국인들
웃기는 사람이 필요하다
선거가 좋긴 좋다
죄라면 이쁜 죄밖에
화성이 홈그라운드인데
한 목사, “김시힙니디”가 뭐지?
또 때리면 맞자

산재에도 꼼짝 않는 공무원
외국인들과 떡
숯불로 구운 오리
순 한국말 써 보기
졸지 마세요
태국인 통역의 진가
눈치 백단 태국인 통역
돈 달라 소리 못 하는 외국인이 수두룩
파혼 I, 버림받은 필리핀 미혼모
보름달 미인, 북 치고 장구 치고
사장, 당신은 해고야
딴 나라에서 온 목사님
공직에서도 이름값 하길!
감독관에게 드리는 부탁의 말씀
세비야의 이발사
최신 수법은 세금 떼어먹기
탈진한 K 간사와 현명하게 타협
닭다리 옮기는 사라펀의 하소연
부서진 초코파이
통장 이름 바꾸기
사장님 머리는 못 당해
일을 너무 잘한 탓
하오·위·둥의 진술서
베트남 청년의 영화 같은 현실
태국인들의 건강검진표
친구도 안 도와주는 걸 내가 어떻게?
입수구리를 움직여라
네팔인, 직장하고 바꾼 푸른 바다
100만 원보다 산재보험이 좋아
시도 때도 없이 인사하는 외국인들
불법 체류자가 양산되는 진짜 이유
남편을 바꿔
사모님이 좋아 내가 좋아?
퐁삭의 아내
고향의 맛
사업장 변경 신청서
흔적을 안 남긴 회사
동굴에 사는 원시인
필리핀인 톰과 제리
라피팟의 비행기 티켓
아들을 출세시킨 수라뎃
여수로 보낸 인도네시아 선원들
사이얀 찾기
남하고 안 싸우니 여간 좋아?
현명한 선택
상습 체불
데드볼을 맞는 타자
무한 고민하는 성실 근로자
별종 태국인
단테와 애플, 크리스마스니까요
긴급 조치 I, 노동부의 초강수
긴급 조치 II, 불법 체류자 양산
폼크룽가(家)의 남매
어머니날 꽃 배달
솜키앗의 수박
퇴직금 더 줘도 문제
큰집 애들 잘 뛰네
내 번호 비밀인데
파혼Ⅱ,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넌 받을 게 없어
치마는 끝났다
베트남인 쭝의 썩소
봄눈 녹듯 풀어진 사장님 얼굴
로또 목사
돈 못 부친 이유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쐬주나 한잔
일요일 아침의 문자
베트남 노동자들이 귀국하지 않는다
똠얌꿍
우리 중 통역 하나만 프로 같다
퐁삭 친구를 찾습니다 I, 이름 모름
퐁삭 친구를 찾습니다 II, 페이스북 덕분에
생생우동
구부렁나무 선산 지키다
단단한 나라 스리랑카
신종 태국인 출현
폐기된 통장으로 들어온 퇴직금
태국 시골의 수탉
회사가 노동자에게 빌리는 돈
그 화장품 냄새
통차이와 4자 통화
병점이나 베들레헴이나
여친이 성추행당했어요
구경꾼 감독관의 마지막 말
반작용의 법칙
스리랑카인의 심장마비
그레이카드
다시 오고 싶은 최고의 회사
개살구
단무지 공장의 몰래카메라
익산 또 가게 생겼다
집사람 때문에요
임신한 태국 여성의 조기 귀국
세상에 한국 사람도
쟤하고 똑같아요
방글라데시식 오두방정
머리털 뽑힌 태국 처녀
오빠, 나 돈 받을 수 있어요?
개나리 여자
고집불통 제니
마누라 마음 돌리고 싶어요
흑룡강성에서 온 남자
사장님만 믿고 하는 아르바이트
여주에서 온 태국인
담배 한 대의 여유
날강도 같은 목사
아주 공갈 염소똥
사인만 안 하면
거기 가면 오고 싶고
응에안의 단결력
아그들
미련곰탱이
막말은 용서 못 해
말이 로얄 워커지
코 아래 진상
Author
한윤수
194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미복 입은 모습이 좋아 외교관을 꿈꿨지만 외교관 월급이 적어 품위 유지하려면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꿈을 접었다. 29살에 출판사 ‘청년사’를 차려 『판초 빌라』, 『본회퍼』, 『산체스네 아이들』, 『여공 20년 후』 등의 논픽션을 출간했다. 1978년 이오덕 선생이 농촌 아이들의 글을 모와 와 시집 『일하는 아이들』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로 출판했다. 1980년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이 10대 노동자들의 글을 모아 와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10대 근로자들의 일기와 생활담』으로 출간했다. 계엄령하였지만 책 못 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무려 2만 부를 찍어 200여 곳 교회 청년회를 통해 뿌렸다. 나오자마자 책은 판금됐고, 청년 사장 한윤수는 도망자가 됐다. 그해 가을 세상이 잠잠해지자 있는 돈 없는 돈 쓸어 모아 글 쓴 노동자들에게 인세를 지급하고 함께 마지막으로 북한산 등반을 했다.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1세기 초까지 대학 및 노동계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고, 원본을 구할 수 없어 복사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청년사’ 운영을 후배에게 넘기고 경기도 고양군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누가 치어(稚魚)도 대 주고, 크면 다 가져다 팔아 주겠다고 해서 가물치 양어장을 차렸지만 가물치의 생태에 대한 전문적 소양의 부족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빚이 늘어 갚을 요량으로 ‘형제출판사’를 열어 가족들 사이의 일을 적은 일기문들을 <고부일기 시리즈>로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무너진 가계는 도무지 회복이 안 됐고 1997년 IMF 사태로 결정타를 맞았다. 채무는 60억 원 가까이 늘어났다. 저당 잡혔던 친구들 집 12채도 다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가물치 양어장 터가 삼송택지개발지구에 수용돼 그 보상금으로 원금을 갚았다. 그러나 생활비는커녕 아이들 교통비도 갖다주지 못한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교회에 가서 같이 앉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부인과 “1. 절대로 죽지 않는다. 2. 희망을 가진다”고 합의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 안 가 본 곳 없이 도망다니다가 결국 부인에게 너무나 미안해 결혼하고도 25년 동안이나 가지 않았던 교회에 1998년 2월 어느 날 제 발로 가겠다고 나섰다. 교회에 간 동기가 일차적으로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빚쟁이들을 피해 보자는 도피 심리가 더 컸다. 그나마 안전하겠지 했던 교회에까지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크리스마스 날 빚쟁이들이 교회로 와서 노래 부르고 있는 그에게 ‘넌 빚을 지고선 즐겁게 노래가 나오냐’고 했다. 빚쟁이들한테 몰려 마지막으로 간 데가 신학교다. 200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고 안산에 오게 되었다. 1년 정도 지나 ‘안산노동자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그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처음 봤다. 새카만 모습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10대 노동자들 생각이 났다. 30년 전 그 애들의 얼굴이 겹쳤다. 맨날 돈 떼이고 두들겨 맞는 것이 똑같았다. 그런데 상담이 맘대로 안 되었다. 어느 날은 상담실이 컴퓨터 교육실이 되어버렸다. 아스팔트에 비치파라솔을 놓고 상담을 했다. 컴퓨터도 전화도 없고 상담일지도 없었다. 내 식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2007년 4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 아무 연고도 없이, 단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경기도 화성시로 향했다. 2007년 6월 5일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우고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가장 돈 잘 받아 주는 센터로 통했다. ‘인생은 60부터’, ‘다시 인생이 바뀌었다’면서 2008년 11월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일명 ‘외국인 노동자 탐구생활’ 백서라고 할 수 있는 ‘오랑캐꽃’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로 있다.
194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미복 입은 모습이 좋아 외교관을 꿈꿨지만 외교관 월급이 적어 품위 유지하려면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꿈을 접었다. 29살에 출판사 ‘청년사’를 차려 『판초 빌라』, 『본회퍼』, 『산체스네 아이들』, 『여공 20년 후』 등의 논픽션을 출간했다. 1978년 이오덕 선생이 농촌 아이들의 글을 모와 와 시집 『일하는 아이들』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로 출판했다. 1980년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이 10대 노동자들의 글을 모아 와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10대 근로자들의 일기와 생활담』으로 출간했다. 계엄령하였지만 책 못 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무려 2만 부를 찍어 200여 곳 교회 청년회를 통해 뿌렸다. 나오자마자 책은 판금됐고, 청년 사장 한윤수는 도망자가 됐다. 그해 가을 세상이 잠잠해지자 있는 돈 없는 돈 쓸어 모아 글 쓴 노동자들에게 인세를 지급하고 함께 마지막으로 북한산 등반을 했다.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1세기 초까지 대학 및 노동계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고, 원본을 구할 수 없어 복사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청년사’ 운영을 후배에게 넘기고 경기도 고양군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누가 치어(稚魚)도 대 주고, 크면 다 가져다 팔아 주겠다고 해서 가물치 양어장을 차렸지만 가물치의 생태에 대한 전문적 소양의 부족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빚이 늘어 갚을 요량으로 ‘형제출판사’를 열어 가족들 사이의 일을 적은 일기문들을 <고부일기 시리즈>로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무너진 가계는 도무지 회복이 안 됐고 1997년 IMF 사태로 결정타를 맞았다. 채무는 60억 원 가까이 늘어났다. 저당 잡혔던 친구들 집 12채도 다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가물치 양어장 터가 삼송택지개발지구에 수용돼 그 보상금으로 원금을 갚았다. 그러나 생활비는커녕 아이들 교통비도 갖다주지 못한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교회에 가서 같이 앉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부인과 “1. 절대로 죽지 않는다. 2. 희망을 가진다”고 합의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 안 가 본 곳 없이 도망다니다가 결국 부인에게 너무나 미안해 결혼하고도 25년 동안이나 가지 않았던 교회에 1998년 2월 어느 날 제 발로 가겠다고 나섰다. 교회에 간 동기가 일차적으로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빚쟁이들을 피해 보자는 도피 심리가 더 컸다. 그나마 안전하겠지 했던 교회에까지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크리스마스 날 빚쟁이들이 교회로 와서 노래 부르고 있는 그에게 ‘넌 빚을 지고선 즐겁게 노래가 나오냐’고 했다. 빚쟁이들한테 몰려 마지막으로 간 데가 신학교다. 200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고 안산에 오게 되었다. 1년 정도 지나 ‘안산노동자센터’에서 연락이 왔고 그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처음 봤다. 새카만 모습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10대 노동자들 생각이 났다. 30년 전 그 애들의 얼굴이 겹쳤다. 맨날 돈 떼이고 두들겨 맞는 것이 똑같았다. 그런데 상담이 맘대로 안 되었다. 어느 날은 상담실이 컴퓨터 교육실이 되어버렸다. 아스팔트에 비치파라솔을 놓고 상담을 했다. 컴퓨터도 전화도 없고 상담일지도 없었다. 내 식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2007년 4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 아무 연고도 없이, 단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경기도 화성시로 향했다. 2007년 6월 5일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우고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가장 돈 잘 받아 주는 센터로 통했다. ‘인생은 60부터’, ‘다시 인생이 바뀌었다’면서 2008년 11월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일명 ‘외국인 노동자 탐구생활’ 백서라고 할 수 있는 ‘오랑캐꽃’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