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시전집 7 (큰글씨책)

악부 1
$48.60
SKU
9791128865572
+ Wish
[Free shipping over $100]

Standard Shipping estimated by Fri 01/10 - Thu 01/16 (주문일로부 10-14 영업일)

Express Shipping estimated by Tue 01/7 - Thu 01/9 (주문일로부 7-9 영업일)

* 안내되는 배송 완료 예상일은 유통사/배송사의 상황에 따라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Publication Date 2022/07/28
Pages/Weight/Size 210*297*30mm
ISBN 9791128865572
Categories 소설/시/희곡 > 고전문학
Description
이백시문학회에서 이백 시전집을 완역한다. 오랫동안 이백을 연구해 온 14명의 전문 학자가 국내외 모든 이백 관련서를 참고하고 수차례의 윤독과 토론을 거쳐 가장 완벽한 정본에 도전한다. 제7권은 〈악부〉 160수 중 31수를 옮겼다. 〈촉도의 험난함(蜀道難)〉, 〈장진주(將進酒)〉, 〈가는 길 험난하구나(行路難)〉 등 이백의 대표적인 악부시들을 만날 수 있다. 정확한 번역과 방대한 주석, 다양한 교감과 상세한 해설은 이백 시를 처음 만나는 사람부터 전문 연구자까지 모두에게 이백 시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 줄 것이다.
Contents
제1수 영원히 이별하네(遠別離)
제2수 임이여, 황하를 건너지 마세요(公無渡河)
제3수 촉도의 험난함(蜀道難)
제4수 양보음(梁甫吟)
제5수 까마귀가 밤에 우네(烏夜啼)
제6수 까마귀는 깃들이고(烏棲曲)
제7수 성 남쪽의 전투(戰城南)
제8수 장진주(將進酒)
제9수 가고 또 가며 사냥하네(行行且遊獵篇)
제10수 날아가 버린 용. 두 수 중 첫째 수(飛龍引二首 其一)
제11수 날아가 버린 용. 두 수 중 둘째 수(飛龍引二首 其二)
제12수 천마의 노래(天馬歌)
제13수 가는 길 험난하구나. 세 수 중 첫째 수(行路難 三首 其一 )
제14수 가는 길 험난하구나. 세 수 중 둘째 수(行路難 三首 其二)
제15수 가는 길 험난하구나. 세 수 중 셋째 수(行路難 三首 其三)
제16수 한없는 그리움(長相思)
제17수 상류전(上留田)
제18수 춘일행(春日行)
제19수 술 한 잔 앞에 놓고. 두 수 중 첫째 수(前有樽酒行二首 其一)
제20수 술 한 잔 앞에 놓고. 두 수 중 둘째 수(前有樽酒行二首 其二)
제21수 한밤중 앉아 읊조리다(夜坐吟)
제22수 들판의 방울새 노래(野田黃雀行)
제23수 공후의 노래(??謠)
제24수 아침에 장끼가 날아오르다(雉朝飛)
제25수 구름에 오르는 즐거움(上雲樂)
제26수 이칙격에 맞춰 불무를 추며 부르는 백구의 노래(夷則格上白鳩拂舞辭)
제27수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노래하며(日出入行)
제28수 오랑캐 없어지면(胡無人)
제29수 북풍의 노래(北風行)
제30수 협객의 노래(俠客行)
제31수 관산의 달(關山月)

부록
〈촉도난(蜀道難)〉에 대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 후기
옮긴이에 대해
Author
이백,이백시문연구회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의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고 이 한림(李翰林)이라고도 부른다. 별칭으로 적선謫仙이라 불리기도 했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며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백의 출생과 어린 시절은 명확하지 않다. 전해지는 바로는 조적(祖籍)은 지금의 간쑤성 톈수이(天水) 부근의 농서현(?西縣) 성기(成紀)였으나, 수나라 말기에 부친이 서역으로 이사해 서안도호부 관할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 이백을 낳았고, 부친이 다시 사천성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청련향(靑蓮?)으로 옮겨 옴에 따라 이백 또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725년(25세) 촉 땅을 떠나서 장강을 따라 삼협을 거쳐 강남 일대를 유람했으며 산동, 산서 등지를 떠돌며 도교(道敎)에 심취했다. 742년(42세) 도사 오균(吳筠)의 추천으로 한림공봉(翰林供奉)에 제수되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자 3년 만에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 다시 방랑의 길로 들어선다.
755년(55세) 안녹산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백은 안휘성 선성(宣城)에 있었다. 57세에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의 막료가 되었으나, 영왕이 권력 투쟁에서 패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이백도 역도로 몰려 강서성 심양(尋陽)에 투옥되었다. 송약사(宋若思)가 구명해 그의 막료가 되었으나 끝내 귀주성 야랑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 삼협을 거슬러 무산에 당도했을 때 특사를 받아 강릉으로 내려가며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을 지었다.

이후 노쇠한 이백은 금릉과 선성을 오가다가 당도(當塗) 현령으로 있던 친척 이양빙(李陽?)에게 몸을 의탁했다. 762년 병이 중해지자 이백은 자신의 원고를 이양빙에게 주고 「임종가(臨終歌)」를 짓고는 회재불우의 한 많은 한평생을 끝마쳤다. 우리에게는 당도에 있는 채석기(採石磯)에서 노닐다 장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이 훨씬 더 익숙하다.

이백은 굴원 이후 가장 뛰어난 낭만주의자로 꼽힌다. 그는 당시의 민간 문예뿐 아니라 진한(秦漢)과 위진(魏晉) 이래 악부 민가를 이어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했다. 더구나 그는 도가에 심취해서 그의 시는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환상적인 경향 또한 짙다. 이백의 문장은 거의 모든 문장 형식을 망라하고 있어 그가 다양한 종류의 글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을 대붕大鵬에 비유하며 기상을 떨치고자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에는 호방하고 높은 기상이 빛나며 타고난 상상력으로 불후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미쳤으며 지금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애송하고 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의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고 이 한림(李翰林)이라고도 부른다. 별칭으로 적선謫仙이라 불리기도 했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며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백의 출생과 어린 시절은 명확하지 않다. 전해지는 바로는 조적(祖籍)은 지금의 간쑤성 톈수이(天水) 부근의 농서현(?西縣) 성기(成紀)였으나, 수나라 말기에 부친이 서역으로 이사해 서안도호부 관할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 이백을 낳았고, 부친이 다시 사천성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청련향(靑蓮?)으로 옮겨 옴에 따라 이백 또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725년(25세) 촉 땅을 떠나서 장강을 따라 삼협을 거쳐 강남 일대를 유람했으며 산동, 산서 등지를 떠돌며 도교(道敎)에 심취했다. 742년(42세) 도사 오균(吳筠)의 추천으로 한림공봉(翰林供奉)에 제수되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자 3년 만에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 다시 방랑의 길로 들어선다.
755년(55세) 안녹산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백은 안휘성 선성(宣城)에 있었다. 57세에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의 막료가 되었으나, 영왕이 권력 투쟁에서 패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이백도 역도로 몰려 강서성 심양(尋陽)에 투옥되었다. 송약사(宋若思)가 구명해 그의 막료가 되었으나 끝내 귀주성 야랑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 삼협을 거슬러 무산에 당도했을 때 특사를 받아 강릉으로 내려가며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을 지었다.

이후 노쇠한 이백은 금릉과 선성을 오가다가 당도(當塗) 현령으로 있던 친척 이양빙(李陽?)에게 몸을 의탁했다. 762년 병이 중해지자 이백은 자신의 원고를 이양빙에게 주고 「임종가(臨終歌)」를 짓고는 회재불우의 한 많은 한평생을 끝마쳤다. 우리에게는 당도에 있는 채석기(採石磯)에서 노닐다 장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이 훨씬 더 익숙하다.

이백은 굴원 이후 가장 뛰어난 낭만주의자로 꼽힌다. 그는 당시의 민간 문예뿐 아니라 진한(秦漢)과 위진(魏晉) 이래 악부 민가를 이어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했다. 더구나 그는 도가에 심취해서 그의 시는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환상적인 경향 또한 짙다. 이백의 문장은 거의 모든 문장 형식을 망라하고 있어 그가 다양한 종류의 글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을 대붕大鵬에 비유하며 기상을 떨치고자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에는 호방하고 높은 기상이 빛나며 타고난 상상력으로 불후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미쳤으며 지금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애송하고 있다.